너의 이름은
“수능이든, 논술이든, 다른 방법으로 낮은 내신 성적을 만회할 문을 너무 좁혀서는 곤란하다.”(이지영, 중앙일보 문화부 차장)
국내 대학 최초로 성적장학금을 폐지한 고려대의 ‘장학금 실험’이 시행 1년을 맞았다. 도입 당시엔 ‘학습 의욕을 꺾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현재는 구성원 다수가 지지하는 분위기다. 염재호 총장은 “공부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역설을 해결하는 것이 성적장학금 폐지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고려대는 성적장학금을 없애고 그 예산(34억원)을 저소득층 장학금, 학생자치 장학금 등으로 배분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저소득층 장학금 예산은 91억1500만원(전체 214억원)으로 2015년(77억원)보다 크게 늘었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겐 매달(방학 포함) 30만~50만원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1904년 4월, 다카하시가 영국의 이런저런 모임에서 가끔 마주쳤던 쿤 로브(Kuhn Loeb & Co.)의 제이콥 쉬프(Jacob Schiff)와 친교를 맺게 된 것이 일본의 금융사, 그리고 정치사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 된 것이다. 유태인이었던 쉬프는 당시 유태인을 박해하던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쉬프는 일본 국채 인수를 결심했을 뿐 아니라, 그의 알선에 의해 일본은 이후 4차례나 추가적인 외채 발행에 성공한 것이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분투와 제이콥 쉬프의 도움으로 일본은 런던뿐 아니라, 뉴욕과 파리의 시장 등에서 총액 8,200만 파운드의 자금을 조달했다. 이 외채 발행 규모는 러·일전쟁에 소요된 전비의 약 40%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한마디로 외채 발행의 성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이끈 숨겨진 요인인 것이다.” _ 구라쓰 야스유키, <금융 대 국가 그 거대한 게임>, 중앙 books, 2009, 30쪽.
*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군사 예산을 축소하려다, 1936년 2월 26일 아카사카의 자택 2층에서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었다. 임종 당시, 그는 육군 황도파 암살범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보같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