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Valentin Alkan, <Le Festin D’Esope>, Op. 39 No. 12
Charles-Valentin Alkan, <Le Festin D’Esope>, Op. 39 No. 12
“케인스주의자들에게 국민 경제는 자동차와 같다. 가속 페달을 밟는 것은 ‘정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삭감하는 것’이다. 반면,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높이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능숙하게 다루는 정부는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통화주의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케인스의 모델을 비판했다. 첫째, 정부는 대개 훌륭한 운전사가 되지 못한다. 둘째, 경제의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는 재정 정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밀턴 프리드먼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화폐적 현상이다.” 그는 “재량적인 화폐 공급 및 금융 정책에 부정적이고, 규칙에 기반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은행의 상황 인식과 정책 실행, 그리고 집행 효력이 실제로 파급될 때까지 각종 지연이 불가피해 재량으로 화폐를 공급하려고 해도 항상 적절한 공급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괴리가 거시 경제에 적잖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1870년대 레옹 마리 에스프리 발라를 창시자로 하고, 이탈리아 태생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에 의해 계승 발전된 경제학파다. 로잔학파는 일반균형이론의 입장에 서 있으며, 스위스 로잔대학의 교수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로잔학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발라는 한계효용에 입각한 새 경제학을 개척했으며, 경제 수량의 상호 의존 관계와 함수 관계를 중시해 어떠한 조건 하에서 그러한 경제 수량이 제일의적으로 결정되는가를 수학을 이용해 밝히는 일반균형론을 전개했다. 한편, 파레토는 발라가 전제한 효용 대신 ‘선택의 이론’을 써서 효용불가측성의 난점을 극복했으며, 순수하게 경험적인 경제량으로서 가격 관계를 통해 일반균형론에 도달했다. 이처럼 로잔학파는 경제학 분석에 수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에 수리경제학파라고도 불리는데 후일 수리경제학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이리저리 들춰보며, 스무 해 전의 다짐이 떠올랐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덧) 예전 역자의 이력이 부크홀츠에 부합한다. 이승환. 1968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미국 예일대 경제학과, 보스턴 칼리지 법과대학원을 졸업했다. 예일대 재학시절 David C. Deforest Public Speaking Prize를 수상했다.
어제 발제를 들으며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떠올렸다. 사기였고 무례였다. 원치 않게 시간을 흘려 버렸다.
“문단에서는 ‘김천 3인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김천 출신이자 중학교 동창인 김연수 작가, 김중혁 작가, 문태준 시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3명 모두 현재 고양에 살고 있다.”
발터 벤야민의 깊은 심심함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 줄탁동시, 전혜린 사후 문예출판사 60년대 중고등학교 국어교사 대상 마케팅, 문명사나 경제사상사 였다면 무엇 하나 조명되지 않을 기억, 서사가 아닌 묘사, 허름한 허세, 30세 이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이 도입부의 목소리에 전율하지 못하고 이십 대가 됐다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은 십 대 시절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소설이니까. 어떤 점에서 [폭풍의 언덕]은 열병의 소설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 헌정한 카뮈의 글, 우리의 유년은 두 세계의 교점에서 자란다. 그 교점에 들어서는 문은 거짓말이다. Müdigkeit / Mündigkeit,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0 < 조도 < 10, 취향, 이박사, 바흐, 청/탁/수/박, 부르디외, "그가 말하는 곳", Manner und Stil, 피터즈 <성년식으로서의 교육>, 리미널리티, 융의 아니마, 니체의 초인, 선악의 저편, 매너리즘
“여러 사람에 의해 개별적으로 발전되어온 여러 요소들을 종합하는 작업을 필요로 했다. 영국에서 이 작업을 했던 학자는 마셜이었다. 그러나 마셜은 1890년 <경제학 원리>에서 부분균형 분석을 택하고, 발라스적인 일반균형은 책의 후미에 수학적 부론으로 간략하게 다루는데 그쳤다. 게다가 오스트리아학파의 자본 이론은 거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 결과 마셜은 지대나 임금을 한계생산성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으나, 이자율의 결정에 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반면, 스웨덴에서 빅셀은 <국민경제학 강의>에서 멩거와 뵘바베르크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학파, 제번스와 마셜로 대표되는 영국의 한계주의, 발라스와 파레토로 대표되는 로잔학파의 일반균형이론 등에서 나온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마셜과는 달리, 명시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초기 한계주의를 완결했다. … 빅셀은 대부분의 다른 경제학자들처럼 상아탑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53세가 되어서야 대학의 정식 교수직에 오른 빅셀은 경제학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당시의 사회 변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사회 개혁을 몸소 실천했다. 그의 경제학은 매우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배후에는 사회 개혁 의지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