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October 13th, 2017

October 13, 2017: 12:17 pm: bluemosesErudition

29. 나르시스와 프로메테우스가 몰락한 이유는 모두 궁극적으로 지나치게 자신에게 집중했기 때문이다.

32. 선교적 영성을 사는 것, 즉 세상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배우는 데는 중요한 세 가지 측면이 포함된다. 비전과 실천과 맥락이다.

: 11:51 am: bluemosesErudition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스웨덴)

: 2:26 am: bluemosesErudition

고레에다 히로카즈 : “작품 속에서 부시를 비판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장내의 웃음이나 박수는, 상영 전후 무어 감독을 향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상영중의 야유에 가까운 웃음에서는, 양질의 지성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거북함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부시가 상대를 업신여길 때 짓는, 품성이 결여된 경박한 웃음과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중략)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 잠깐 동안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제작자의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짜 적은,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고,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고이즈미)만을 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 2:15 am: bluemosesErudition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한 때 자신을 ‘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리얼리즘 작가로서 현실을 다뤘고 무엇보다 그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작가로 성장하던 1950년대의 소설에서는 서사가 사라지고 있었다. 당시 주목받던 누보로망(Nouveau Roman) 작가들은 현상학적 인식을 토대로 파편화된 소설을 기획하면서 이데올로기에 종속될 수 있는 과거 소설의 관습을 타파하려 했다. 다시 말해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갖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인식을 미시적으로 서술해 독자가 의미를 생산하게끔 만든 것이다. 그런 새로운 시도가 어떤 문학적 가치를 갖는지와는 별개로, 점점 문학이 난해해지면서 대중은 문학과 유리돼 갔다. 다시 말해 뚜렷한 메시지를 잃어버린 작품들이 소설의 주류로 등장하면서 기존 소설의 죽음이 거론됐던 것이다. 그런 때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혜성처럼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에 밀란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동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에게 이러한 말은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2:03 am: bluemosesErudition

그란 콜롬비아. 1819~1831년 남미의 공화국. 영토는 오늘날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 전체 및 코스타리카, 페루, 브라질, 가이아나의 영토도 부분적으로 포함하였다. 남미 해방의 선구자인 시몬 볼리바르는 미합중국의 예를 본받아 에스파냐 식민지 모두를 아우르는 대 콜롬비아 공화국을 구상하였다. 이후 연방주의자와 분리주의자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북미도 남미의 강력한 통합국가를 원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