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책을 탁, 덮는다 방금 누군가 나를 포기했다”
12.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다툼, 만약 제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자가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면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수십 년 동안 언어의 독방에 갇힐 수도 있을 테니까.
12. “전신마취를 하면 인간은 그때 그냥 죽는 거야. 문서를 복사하면 열화가 일어나듯이 오랜 시간 마취됐다가 깨어난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야. 일종의 복사물인 거지. 도마뱀의 꼬리도 잘리면 다시 자라나긴 하지만 원래 크기로는 자라지 않는다잖아.”
13. 회사 담벼락에 노조가 붙여놓은 플래카드를 봤대요. ‘해고는 죽음이다.’ 그걸 보고 오빠가 뭐라고 했을지 저는 알아요. “아니지, 죽음이 해고지. 해고된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명언이나 상투어를 뒤집어서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오빠의 오랜 버릇이거든요. “해봐. 이상하게 다 말이 된다니까.” … 가끔 어떤 격언은 뒤집어놓으면 더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금이 침묵이다’ 같은 말이 그래요.
36. 언니, 수학에 이런 방정식 있잖아요? 예를 들면 3x+4xy+6xyz = 8이라고 해요. 그럼 좌변에서 x를 괄호 밖을 빼낼 수 있잖아요. x(3+4y+6yz) = 8. 여기서 x가 아빠예요. 아빠를 괄호 밖으로 빼내면 수식은 참 단순해져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에요. 수식을 잘 보세요. 괄호 밖에서 x가 모두를 가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36. 그런 거 아세요? 잘 배운 미국 백인의 전형적인 미소 같달까. 나는 흠잡을 데 없는 공정함과 바다 같은 너그러움을 갖고 있으며 불쌍한 너에게 작은 도움을 제공하고자 하는데, 이를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으니 어서 결정하렴, 같은 뜻을 담은 미소요.
40. “현주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 있지? 이 말은 영 뒤집을 수가 없네. 뒤집어도 똑같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가 돼.”
_ 김영하, <오직 두 사람>, 문학동네, 2017.
103. 내가 꿈꾸지 않는다고 내 생이 허물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풍성함은 우리의 고난에 구애받지 않는다.
126. “오늘 이밤에 우리 모두 오른손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시다. ‘하나님, 저 좀 그만 때리세요!’” 나는 저들의 고통과 슬픔을 해결할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님 앞에 함께 하소연하고 부르짖는 믿음의 선배로 그곳에 서 있었다.
134. 그들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를 나는 안다. 내 말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나를 보고 싶어서 온다.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고통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오는 것이다. 자기 삶이 특이한 게 아니라 평범한 또 하나의 삶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온다.
140. 고난당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이 너무도 불합리해 보이기에 하나님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은 불순종입니다. 믿음은 신뢰, 이해, 순종을 총괄하는 말입니다. 의심은 그 중 이해에 해당합니다. 믿음에는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불신앙은 무관심으로서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절대적 회의주의입니다. 신자에게 의심은 성장을 위한 과정이지만, 불신앙은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입니다.”
145. 나는 다윗의 시편 기도를 보고 자주 놀란다. 다윗은 정말 솔직하게 하나님을 찾았다. 그 본연의 모습이 기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시편을 읽고 묵상하면서, 나는 다윗이 얼마나 격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5:23). 이 기도는 다윗이 함께 성전에 올라가던 동료가 자기를 배신하자 그가 요절하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자기 삶을 졸지에 궁지로 몰아넣은 친구를 파멸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원망과 원수에 대한 적대감을 하나님께 모두 토로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원망을 내려놓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신뢰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게 된다. 결국 우리 마음속 깊은 데서 끓어오르는 원망이 내뱉어져야 하나님의 긍휼 어린 성품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160. 사랑하기 때문에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외아들’을 주셨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163~167. 찾아가 보는 것, 그것이 먼저다. 병을 고치려 하기보다는 찾아가 들여다보는게 먼저다. 분명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어린 방문이다. … 고난당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와 함께 있어 줄 친구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다.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연약한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가 버림받고 잊혀졌다는 고립감에 빠지지 않도록, 함께함으로써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함께’라는 소속감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174. 고통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중에도 겪을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겪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때문에 겪는 일일 수도 있다. 신학자 윌리엄 올브라이트의 말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형통해진다는 믿음처럼 진리에서 멀어진 믿음은 없다.” 이 땅에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얻는 삶이 축복이 아니다. 잃음과 얻음을 반복하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축복이다.
179. 폴 투르니에가 말한대로, 고난을 이기는 과정이 축복이지 고난 자체가 축복은 아니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삶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180. 고난의 비밀은 세월이 흐르고 끝까지 성실하게 믿음의 경주를 마친 사람에게 비로소 드러난다. 점을 치듯이 고난의 이유를 알려고 애쓰기보다는 고난 중의 요셉처럼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지 않겠는가. 고난당하는 순간 고난의 뜻을 아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인내하며 달릴 뿐이다. 아내를 일으켜야 하는 절실한 기도에는 침묵하시고 이보다 훨씬 덜 중요한 문제에는 확실한 응답을 주시는 이유가 무얼까?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사실은 “외적인 어려움이 내면에 불을 붙였다”는 것뿐이다. C. S.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서 여왕 오루알은 순례를 끝내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제게 왜 응답하시지 않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응답입니다. 주님을 대면하면 모든 의심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다른 응답이 또 필요할까요?”
186. 광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능력과 존귀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반면에 인간의 완악함과 교만, 불만족과 연약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광야는 이러한 두 가지 실재가 벌거벗은 채 만나는 곳이다. 살아 있고 먹고 있으면서도 좀더 좋은 것을 달라고 불평하는 인간과, 인간의 불평에 때로는 분노하고 벌을 주시면서도 한결같은 은혜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만난다.
191.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란다.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믿음이 성장하는 출발점이다. 모든 것에 주도권을 갖고 사는 한, 믿음이 자라기는 어렵다. 그저 자신의 관리 능력만 자랄 뿐이다.
김병년, <바람 불어도 좋아>, IVP, 2013. _
43.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에 사용한 가시로 추정되는 ‘아타드 가시’의 나무는 밀밭 사이에서 주로 자라며, 추수하는 농부들의 휴식처라고 한다.
48-49. 히브리어로 ‘육체’를 의미하는 단어는 ‘바사르’다. 바사르는 동물이나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로, 결코 하나님과 관련해 사용되지 않는다. 바사르는 ‘그 자체로 허약하고 몰락할 운명’이라는 특징이 있다. 즉 하나님과 대조할 때 인간은 무력하고 의지하지 못할 존재다. 바사르는 언제나 인간 능력의 유한함과 불충분함을 묘사하고, 신의 위대하고 믿을 만한 능력과 대조된다. 바사르는 ‘본질적으로 몰락할 인간’이다. 바사르와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 바로 ‘루아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영이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부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몰락하게 된다.
63.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11분’은 외로운 남자들이 홍등가를 찾아와서 욕망을 해소하는 시간 길이를 말한다. 내가 느낀 것은, 강렬한 욕망에 비해 연인 앞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연인 앞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강렬한 성적 충동을 해소할 때까지 뿐이다. 충동이 만족되는 순간 머묾도 끝이다. 결국,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상대방 곁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하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전부터 나라는 사람은 ‘침대는 공유하지만 감정을 나눌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난 항상 분주했다.
79. 그러나 삶은 녹록하지 않다. 시간이 지난 뒤에 장모님은 딸의 똥마저 향기롭다고 하시지만, 배우자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그리움이 자라 간다. 딸의 몸에 칼 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엄마는 장애를 가진 딸을 더 사랑하게 되었지만, 아내를 살리려고 수술을 강행하던 남편은 삶의 무게 앞에 마음이 자주 무너졌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삶의 고통이 내가 내린 결정을 후회하게 한다. 생명을 살렸으나 인생의 짐은 너무도 무거웠다. 인생은 참 냉정하다. 선한 선택을 했다고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 바른 선택을 했다고 칭찬해주지 않는다. 무엇을 선택했든 그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한다. 목사로서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동역자 친구가 있다. 나의 첫 책을 다 읽은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년아, 널 만나러 가지 못하겠다.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그리고 오해하지는 말고 들어라. 나는 사모님이 죽었으면 좋겠다.”
121~122. 우리 삶에 가장 지혜로운 안내서로 여기는 책은 잠언이다. 그런데 잠언에는 놀랍게도 감사라는 단어가 단 한 번 언급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31장에서 현숙한 여인이 자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는다. 그게 전부다. 잠언은 자녀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을 가르친다. 악인을 따르지 않는 법, 선을 행하는 법, 의인으로 사는 법 등을 말이다. 잠언은 ‘가식을 강요하는 문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 성경에는 생각보다 불평하는 삶이 많다. 예언자들이 불평한다. 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들의 생애 가운데 감사라는 단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있지만 그들의 현재는 ‘눈물 흘리는 짐승’ 같았다. 제임스 패커는, 아픈데도 울지 못하게 하고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 기독교의 한 형태가 아니라 르네상스 이후 서구 문화에서 볼 수 있는 플라톤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128. [눈은 거의 실명하고 다리 부상으로 휠체어를 타고 유방암으로 고생했던] 미르바 던은 범사에 감사하다는 말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성품과 뜻”을 깨달을 때 나온다고 했다. 내가 그러하다. 난, 그런 의미에서 범사에 감사한다. ‘감사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고백하다’라는 말과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고백적인 감사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삶의 어떤 상황을 전제로 한다. 감사 기도와 탄식 기도는 대체로 질병, 죽음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함께 나온다. 그런 배경에서 탄식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만 상황의 전환이 없을 때 나온 것이고, 감사 기도는 환란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드려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써 선포하며 감사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자연스럽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때 감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