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생경하고 새삼스러운 태도가 시를 쓰기 좋은 태도”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인가요?
그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공감을 한다는 건 ‘난 이걸 알아’라는 태도잖아요. 그러면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요. 어떤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시의 자리는 공감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내려면 ‘이게 내가 알던 건가? 내가 알던 게 이게 맞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생경함의 자리, 놀라움의 자리로 가야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좋은 지점이라는 생각은 굳어져 온지 오래돼서, 한편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요. 저 역시 그런 이상함과 생경함에 끌려서 시를 시작하게 됐으니까, 끊임없이 공감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게 제가 시를 만들어내는 방식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쓴 시가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라고 생각되는 건 아니기도 해요(웃음).
시를 쓸 때 독자에게 전할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메시지를 던지는 건 정말 의미가 없어요. 아주 일시적이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메시지를 갖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말이, 오히려 그 말을 선택하는 순간 훼손돼요. 손상되고 아무것도 아닌 덜 떨어진 종류의 말로 메시지가 갈 수밖에 없어요. 말하자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하고 짚어서 전달하는 게 아니고, 그물을 더 넓게 펼쳐서 던지는 거예요. 그러는 편이 원래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 생각, 진정성을 덜 훼손시켜요. 창작이란 깎아나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훼손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면 메시지를 깎지 말고 구조를 깎아야 되는 거예요. 구조가 알아서 메시지를 더 크게 만들거나, 더 다양하게 만들거나, 더 힘 있는 형태로 만들어줄 테니까요.
“술술 읽히되 뭔지는 금방 안 들키는 시를 쓰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시를 쓸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읽었을 때 바로 쓱 읽혀야 된다는 거예요. 시의 층위가 미로라고 생각하면 출구가 있어 보이고, 암호가 있어 보이면 암호를 푸는 순간 다 알았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 순간 생각이 멈춰요. 그래서 저는 한 번에 읽히는 시를 쓰는 게 좋아요. 시가 가진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텍스트 자체는 쉽게 읽히되 그것이 무엇인지는 들키지 않게 만들고 싶은 거죠. 그게 제가 시를 쓰면서 갖고 있는 태도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