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권위의 머릿돌
“어릴 적부터 《셜록 홈즈》를 좋아한 김재성 선생님은 추리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대요.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거쳐 앨라배마 주립대 영문과에서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추리 작가의 꿈을 키웠지요. 글쓰기를 계속하면서도 미국에서 치과 의사가 되었고, 귀국 후 경찰청 과학수사대에서 사람의 치아를 조사해 범인을 잡는 일도 시작했어요. 《경성 새점 탐정》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 소천아동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한국추리작가협회를 이끌고 있어요. 2018년 현재, 평화로운 섬 제주도에서 ‘생에 가장 사랑했던 장소’의 이름을 딴 병원 ‘샌프란시스코 치과’를 열어 환자들을 돌보고 있어요.”
어쩌면 구취에 찌든 펜들은 시도 산문도, 더욱이 삶도 아닌 망상에 엎드렸다. 풍진 앞에서 저 활자의 묶음은 그의 소멸될 소감대로 쓸모 없이 풍장되리라
문: 초등학생 때부터 일관되게 학교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교육학과에 진학해 교육부 장관이 되어 학교 교육을 개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육학과를 가니 너무 지루했어요. 그래서 학교를 잘 안 나가다가, 우연히 국어교육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처음 들은 수업이 오태환 시인의 소설 창작 수업이었는데, 종강 날까지 그분이 시인인지 몰랐어요. 누더기 모자를 쓴, 빈말 못 하는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분의 수업이 참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안 웃고 저만 웃는 거예요. 종강 후 더 가르쳐 달라고 연락 드렸던 유일한 선생님입니다. 등단 전까지 삼 년 동안 어르신들과 함께 오태환 시인의 시 수업을 들었고 거기에서만 시를 보여주고 쓰고 했습니다.
문: 1인칭 화자가, 불행하다고 비명을 내지르다가 끝나는 시에 진력이 났던 것 같아요. 제 등단작은 자기 얘기밖에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니, 제 시에게 미안하네요…. 저는 그냥 좀 웃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슬퍼서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등단하고 좀 헤맸어요. 한 삼사 개월은 재미없는 시를 썼고, 그래서 그 시들은 시집에 넣지 않았습니다. 등단하고 파일을 두 개 만들었어요. 시 파일과 딕싯(제가 좋아하는 게임 이름) 파일. 시스러운 건 시 파일에 넣어서 발표하고 딕싯 파일에는, 시인지 의심스러운데 혼자 은밀히 좋아하는 이상한 글을 넣고 발표는 안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 파일은 비고 딕싯 파일에만 글이 쌓였습니다. 작년 4월부터 9월까지 딕싯에 쓴 글을 모아서 투고했어요. 저는 원래 시를 빨리 못 쓰고 많이도 못 쓰는데요, 대신 일기는 심각하게 많이 써요. 일기병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작년에는 시와 일기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던 시기여서, 일기를 쓰다가 시가 된 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 이건 여담인데. 언젠가 친구에게서 김언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시 백 편을 쓰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다고. 그런데 그 말이 묘하게 자꾸 떠올랐습니다. 한동안 일기장에 백,이라고 써놨었어요. 내가 쓰는 이런 글들이 시가 맞나, 시라고 우겨도 되나, 겁날 때,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일단 백 편 쓰고 생각하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 예전에 어느 문예지에 시를 발표할 때 시작 노트를 함께 첨부한 적이 있어요. [오리털파카신은] 그때, 시작 노트에 썼던 글이에요. 그래서 그게… 시작 노트여야 하니까 그렇게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누가, “너는 등단작보다 등단 소감이 좋고, 시보다 시작 노트가 더 좋으니까 그냥 등단 소감을, 시작 노트를 시라고 우겨보는 건 어때”라고 악담을 했고, 그 말이 좋았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있는 쪽으로 걸어가게 용기를 주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메타를 자주 사용하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문창과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너네는 웬만하면 메타하지 마라, 그냥 하지 마라’라고 말한다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사람들이 메타시를 많이 쓰는지도 잘 몰랐고,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도서관에 있으니까 눈에 뵈는 게 책밖에 없고, 책을 읽는 인간들밖에 없어서 책에 관해 썼던 것 같아요. 아마, 이걸 시집 한 권 분량으로 써내야 할 만큼 좋아했나 봐요. 이제 메타시는 잘 안 쓸 것 같아요.
김: ‘신’에 대해서는 저도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네요. 다만 2010년대에 등장한 다른 시인들은 ‘신’에 대해 저마다 다르면서도, 문보영 시인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한데 묶어지는 의견을 내놓지 않을까 싶네요. 아마도 “강아지나 팅커벨 아니면 너구리일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듯해요. 현실에 대한 부채감이나 절박함에서 호출하는 신이 대부분인 가운데, 문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신은 훨씬 슬림해지고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요. 거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신 같아요. 이건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시를 이끌어가는 화법이나 시에 녹아 있는 정서도 2010년대 등장한 일군의 시인들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어쩌면 2020년대 시의 윤곽을 『책기둥』에서 미리 맛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만큼 2010년대 시와 이어지면서도 결별하는 지점이 분명히 보이는 시집이라는 판단을 조금 이르게 해봅니다. 어떠세요? 문보영 시인은 동시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점에서 자신의 시가 그들과 다른 위치에 놓이는지 생각해보셨는지요?
문: 예전에 꿈을 꿨는데요. 버스 정류장 앞에 여고생 둘이 서 있었어요. 저는 목발을 짚고 있었고요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정류장 전광판에 박보영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여고생 둘이 박보영 사진을 보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습니다. 박보영 같은 시를 쓰자…라고요. 박보영은 다정한데 왠지 강해 보입니다. 아이유도 그렇고. 저도 강하고 싶어요. 그리고 동시에 귀엽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귀엽고 강하고 다정하고 괴팍하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귀여운지는 모르겠지만 귀엽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점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문: 시가 되는 문장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문장으로 승부하는 시에 조금 흥미가 동난 것 같아요. 등단하기 전까지 그런 시를 주로 썼고 어느 순간 지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보다 다른 시인들이 더 잘하는 것 같고, 제가 그걸 하기엔 너무 소설을 좋아해요. 그런데 소설을 쓰는 건 안 좋아하고요. 무엇이 시이고 시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작년부터인가, 시를 읽을 때, 별로 안 좋은 시를 읽었을 때 제 반응은 ‘이건 시인데?’였고, 진짜 좋아하는 시를 만났을 때는 ‘오, 이건 시가 아니잖아?’였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시한테 너무 핍박받아서 넌더리가 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데, 시가 아닌 요소로 더 많이 구성된 시를 좋아한 것 같습니다. 괴팍한, 좀 짜증을 부리는 시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뭐가 시가 아닌지는 모르겠고 사실 모르고 싶기도 한데요, 어쨌든, 시가 아닌 쪽으로 바운더리를 넓혀가는 시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문: [이번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시 3편을 꼽는다면] 「뇌와 나」, 「파리의 가능한 여름」, 「과학의 법칙」. 「뇌와 나」는 우선, 수록된 시들 중, 가장 길어서 아무도 안 읽을 거고, 낭독회에서 절대 낭독도 할 수 없으니까 저라도 많이 애정해야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쓰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저를 떠나는데, 떠날 때마다 소파에 뇌를 두고 떠나요. 그래서 저는 그 뇌를 헬멧처럼 쓰고 상습적으로 추억합니다. 추억하다 과로사하고요.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을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로 날려 먹고 그 상처를 다시 사람에게 받은 사랑으로 갚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리의 가능한 여름」은 아까 언급된 세 명의 시인이 처음 나오는 시에요. 그래서 정이 많이 들어버렸고요. ‘파리’는 똥파리인데 사람들이 프랑스 파리로 착각해서 좋은 것 같아요. 「과학의 법칙」. 이 시 때문에 사람들이 제가 이과생이거나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아요. 시집에 수학, 과학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제가 과학과 수학을 소재로 시를 쓸 수 있었던 건, 비문학 서적을 읽을 때 이해를 잘 못해서, 제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책을 읽을 때보다 오독이 원활하달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딴생각을 하다가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문: 카프카도 좋아하고 박상순 시인도 무척 좋아합니다. 김언 시인도 좋아합니다! 『소설을 쓰자』라는 시집은 제목이 너무 탐나요. 제 시집 제목으로도 좋지 않나요? 그래서 시집을 쇠사슬로 묶어 지하실 창고에 넣은 뒤 개와 바람으로 그 입구를 지키게… 하지는 않았고요. 사실 저는 거의 모든 시인에게서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정말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저는 거머리 같은 사람입니다. 제가 읽고 나면 책이 저에게서 피 빨린 것 같아요. 그래놓고 시를 잘 안 읽는 것 같기도 해요. 시를 정말 안 읽어요. 그러니까 재작년까지 시를 미친 듯이 읽었는데 작년에는 세 권도 안 읽은 것 같아요. 거의 비문학 서적과 소설을 읽다가 혹은 일기를 쓰다가 시를 씁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엠마뉘엘 카레르, 플래너리 오코너, 엘프리데 옐리네크, 베케트 등등.
문: 르포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좀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소설만큼 바글거리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페렉의 『인생사용법』이라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시를 쓸 때 그런 시를 쓴다면 어떤 시가 나올까 궁금해요. 그러니까 시집 한 권이 아파트이고 그 아파트에 사는 인간들에 대해 쓰는 시…… 오, 방금 생각해 봤는데 정말 별로일 것 같네요. 어떤 문학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다시 시가 쓰고 싶었으면 좋겠고요, 사람들이 읽다가 킥킥 웃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 작품 쓸 때 고통스럽지 않나.
“아니, 전혀. 힘들면 안 쓰면 된다. 소설 쓰기를 거리 청소와는 다른 정신적 고뇌의 엄청난 여정인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도 봤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 글 쓰는 스타일이 궁금해진다. 왠지 굉장히 자유로울 것 같은데.
“나는 글쓰기 계획이라는 게 없다. 내 소설은 치밀하게 플롯을 짜야 쓸 수 있는 스릴러나 장르적인 특징을 가진 게 아니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쓰는 편이다. 일단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으면 며칠이고 생각한다. 스토리를 생각하는 게 아니다. 나는 소설을 쓴다,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가령 어느 날 꿈에서 인상적인 이상한 문장을 만나면 잠에서 깬 다음 그 문장을 적어뒀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식이다. 그 문장이 소설의 첫 문장일 필요는 없다. 문장이 아닐 때도 있다. 우연히 마주친 어떤 감각이나 사람, 장소가 모티프가 돼 소설이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 마주침을 위한 모드 전환의 과정, 소설의 모티프가 내 몸에 잘 들어올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단계가 필요한데, 그게 찾아올 때까지 몸을 데운다고 할까, 기다리는 거다.”
-소설은 주로 독일에서 쓴다고 들었다. 낯선 환경에서 소설이 잘 써지기 때문인가.(배씨는 1년에 두 달 정도는 독일에 체류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번역을 한다)
“그런 이유도 있다. 외국에서는 감각이 새로워진다. 감각이야말로 육체의 옷인데, 굉장히 잘 입어야 한다. 그게 글을 좌우한다. 나는 집에서 소설 쓰는 게 상상이 잘 안 된다.”
- 제발트 소설의 어떤 점이 매력적인가.
“그의 글은 픽션인지 산문인지 경계가 애매한데, 무엇보다 언어가 마음에 든다. 처음 그의 작품을 읽었을 때 충격적일 정도로 독일어 문장이 아름다웠다. 그는 치밀하게 연구하고 자료를 모아 글을 쓰는데 플롯이 평범하지 않다. 한 얘기에서 갑자기 다른 얘기로 넘어가고 그러면서도 어떤 감정으로 독자를 휘어잡는 힘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건 그의 독특한 글감이다. 무엇에 대해 쓸 것인지를 굉장히 잘 선택하는 것 같다.”
“나는 제발트를 읽었다, 그 이후에도 하루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변한 것은 단 한 가지, 제발트 이전과 제발트 이후가 있을 뿐.”
사람들은 시가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그 말은 기분 좋은 말입니다. 저는 평소에 제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내가 아무리 쓸데없어봤자 시만큼 쓸모없겠냐 싶고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수업 조교를 할 때였습니다. 학생들에게서 문자가 오곤 했습니다. 3회 이상 결석하면 불이익이 있나요. 과제를 늦게 냈는데 불이익이 있습니까. 저는 전체 문자를 날립니다. 우리가 태어난 거 자체가 불이익입니다. 공지사항에 다 나와 있습니다, 라고요. 그럼 어떻게 살지요? 본전만 뽑자, 이것이 제 좌우명입니다. 오늘은 제329회 연금 복권이 발표되는 날입니다. 2000원을 주고 두 장을 샀는데 2000원이 당첨되었습니다. 본전을 뽑았습니다. 세상과 제가 잠시 균형이 맞았습니다. 본전 뽑는 게 살면서 제일 어렵습니다. 일 등 당첨되는 자보다 본전을 뽑는 자가 더 훌륭한 것 같습니다. 이따금 혼자 되뇝니다. 불행에서 본전만 뽑자. 너무 아프면 안 돼. 나쁜 기억에서는 본전만 뽑는 거야. 너무 기억하진 마. 사랑에서 본전만 뽑자. 사랑한 만큼만 아프면 이제 그만 됐다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생선 뼈 바르듯이 시를 읽습니다. 제 시가 읽힐 때도 생선 뼈 발리는 기분입니다. 시는 삶이야, 라는 말은 이상합니다. 시는, 바나나가 삶인 만큼만 삶이고, 선풍기가 삶인 만큼만 삶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라는 놈은 늘 누워 있는데 배가 고파서 조금 화나 있습니다. 놈은 뭔가 잘못 먹은 게 틀림없습니다. 그놈이 별 뜻 없이 이를 악, 물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난데없이 가슴이 찢어질 리 없습니다. 별 이유 없이 시를 씁니다. 시를 쓰는 순간만 아프지 않고, 시를 쓰지 않는 나머지 시간이 너무 지루합니다. 사람들은 손잡이가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시를 쓸 때만큼은 사람의 무릎이나 겨드랑이 아니면 허벅지에 난 점 따위에 달린 작은 손잡이가 보이며, 열릴 리 없지만 왠지 열고 싶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 일기를 읽어주시는 블로그 이웃들에게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시는 모든 친구들에게도요. 그리고 피자의 조상 에트루리아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문보영, 2017.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