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pril 26th, 2010

April 26, 2010: 8:43 pm: bluemosesErudition

1.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좋은 보고와 균형있는 코멘트 그리고 은근한 힘의 통찰. <<현대 일본을 찾아서>> 옆에 두면 적절할 듯.”

2. “노마 필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너무 좋은 책이다. 국가와 개인, 전쟁과 평화, 인권, 계급, 일본과 식민지, 미국과 동아시아, 혼혈아, 여성문제, 전통과 현대, 이 모든 주제들에 관한 사색거리가 가득하다.” ”특수를 보편으로 고양시키는 글쓰기가 돋보인다.”

3. “쓰루미 슌스케, <<전향>>. 15년 전쟁기(1931~1945) 일본지식인들의 모습을 통해 사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decency.” “더 중요한 것은 독서의 순서를 확실히 잡았다는 거지. 마루야마나 고진은 아주아주아주 나중에 읽어야 한다는 것.”

4.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에 이이다 다이조가 쓴 한국어판 서문”: 그는 ‘思想史’보다는 ‘精神史’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화려한 군주>>, <<21세기 천황제와 일본>>을 읽은 다음 ‘천황제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불과 9페이지에 앞의 두 책 내용이 남김없이 담겨 있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아니 접속사까지도 버릴 수가 없다. 후지타 쇼조! 소름이 쫙 끼친다.”

5. <<화려한 군주>>, “존 다우어, 노마 필드, <<21세기 천황제와 일본>>, 슌스케, 쇼조, 마루야마. 이렇게 읽고 시간 남으면 고진을.”

* 사상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체제로서의 윤리적 습관이다: 체면, 품위, 예절.

: 8:40 pm: bluemosesErudition

知와 情과 意를 점층적으로 포섭하는 영향력의 극대화가 형식(form)의 몫이라면, 眞과 善과 美를 인격적으로 통합하는 영향력의 체계화는 내용(substance)의 몫이다.

: 8:33 pm: bluemosesErudition

“예술은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도달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향한다면 가까워질 수는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은 조금씩 더 나아집니다. 늘 새로운 순간에 자기보다 더 많이, 더 높이 나아가 더 나은 자신이 되도록 하는 일 역시 예술의 몫이라고 생각해요.”(Lev Dodin)

* 이상 = 이데아, 이상적인 = 이데아적인(ideal). 이데아가 眞, 善, 美로 분리된 사상적 기원은 ‘마키아벨리‘에서 유래한다.

: 8:25 pm: bluemosesErudition

실존주의는 그것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가장 급진적인 자기변혁 사상으로 태동했으나 가장 보수적인 자기계발 담론으로 귀결되었다.

: 7:13 am: bluemosesErudition

1. “나는 칸트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서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의 느슨함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 말을 아나키스트(어소시에이셔니스트)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그들의 윤리성이나 자유 감각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을 강제하는 사회적 관계의 힘에 대한 논리적 파악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시도는 항상 무력하고 비극적으로 끝난다(柄谷行人, 2001[2005]: 17).”

2. “마을공동체라고 하면 긴밀하고 친화력이 있는 집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 전에 기다 미노루라는 필명으로 <미치광이 부락 주유 기행>(1948)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프랑스에서 공부한 인류학자였다. 이 책은 차별적인 단어를 쓴 제목 때문에 한때 배척되기도 했지만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그저 평범한 일본의 농촌을 우주인이 처음으로 보는 것처럼 관찰한 것이다. 그 중에서 인상에 남는 것은 농민 사이에 우정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자기’가 없는 것이다. 중심은 ‘사회’고, 그들은 그것을 무서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립을 두려워해 사이 좋게 지내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그럴 뿐이다. 근본적으로는 이기주의적인데도 ’자기(에고)’는 없다(柄谷行人, 2000[2001]: 29).”

3. 자아의 위계에서 경계로의 전환을 통해 역설이 해명되었다. ‘도덕감정’(혹은 윤리) 비판에 머물러 있던 이론적 교착상태에서 CP는 이전의 사유를 재전유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