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pril 21st, 2010

April 21, 2010: 4:02 am: bluemosesErudition

0. 2010 LG아트센터 기획 공연: “레프 도진 연출,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 <바냐 아저씨>”

1. “인격의 3요소를 지, 정, 의라 한다면 과학(논문)은 知를 파악하고, 문학(희곡)은 知를 동원하여 情을 호소하며, 예술(연극)은 知와 情의 토대 위에 意를 추동한다. 인격의 도야를 유념한다면 진정한 교육은 연극에 이르러 완성된다.” 

2. 교육의 이상은 “경건을 향한 부단한 정진”이다. 여기서 경건은 개인적/사회적 차원을 아우르는 것으로서 본질(眞)과 당위(善)의 완전을 추구하는 예술(美)이다.

3. 근대 이후 진, 선, 미의 통합인 교육의 이상은 지식, 윤리, 기예로 분열된다. “인간의 욕망이나 의지 등에 의해서 지배되는 윤리적 가치 이외에 다른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욕망이나 의지에 기초를 두지 않은 새로운 가치이어야 한다. 그것은 예술적 가치이다.” 따라서 “예술적 가치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음란물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4. “새로운 군주의 덕은 타고난 것이 아니요, 내면의 품성을 수양함으로써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다. 군주는 필요에 직면해서 역량을 보여야 한다. 그 역량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보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자기 충족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외양과 결과이다. … ‘보통 사람들은 외양과 결과에 의해 감명을 받기 때문’이다. 외양과 결과, 이는 사물의 본질과 당위를 따져 물을 때는 제시될 수 없는 항목이다. 이것이 바로 ‘실효적 진리’(verità effettuale)의 내용이다. 실효적 진리를 추구하는 새로운 군주. 그는 경멸과 미움을 받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점을 <군주론>에서 아주 여러 차례 반복한다. 물론 새로운 군주는 이러한 소극적 차원을 넘어 무자비해야만 한다. 그는 ‘살아 숨쉬는 정신’(animo)를 가진 군주는 고대의 덕의 완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 근대의 정치는 이로써 관조에 의한 지혜의 차원을 폐기한다. 마키아벨리와 그의 군주는 이로써 새로운 자들이 된다.” _ 근대에 이르러 지식이 폄하한 정보는 진리가 되었다. 실존주의 사상이 표방한 문제해결식 학습은 마키아벨리식 덕목의 오마주였다. “군주는 필요에 직면해서 역량을 보여야 한다.”

5. 사상은 [근원적으로 사태를 탐구하는 방법론인]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정합적으로 세상을 규정하는 세계관으로서, 백가쟁명의 소산이다.

6. Post-modernism이라 불리는 “초점 없는 혼합주의”는 1)거대담론의 망실, 2)축적체제의 변형, 3)평생학습의 대두에 의해 형성되었다. 황지우 시인이 포착한 大腦에서 性器로의 전환은 주체성과 자율성의 기치를 고양하였으나 - 하루키와 같은 - 상품화된 대안의 구입은 ‘다양한 획일’ 내지 ‘모래알의 시멘트화’를 양산하였고, 이러한 전체주의로부터의 탈선은 환상으로의 도피로 귀착한다.

7. 1968 프랑스 혁명, 1969 일본 전공투, 그리고 1992 한국 서태지와 아이들 “환상 속의 그대”

8. 강의의 핵심은 텍스트 전달에 있지 않다. 그것의 관건은 텍스트를 학생의 이야기로 전환하는 것이다. - 나는 이것을 Lev Dodin에게서 배웠다. “만약 어떤 연극이 재미있다면 그것은 관객이 그 연극에서 자신의 삶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 서정성에 사회성을(상상력에 권력을) 담는 것, 어쩌면 이것이 실존주의 사상의 태생적 기질이자 형식적 기여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생동하는 실재, 그리고 그러한 실재가 충분히 파악된 감정 상태와 관련되기 때문에, … 사실상 문학에 가깝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지적 논쟁과 마찬가지로 감정 상태를 전달하고자 개성적이고 문학적인 방식으로 집필하고, 또한 각자 자기 나름의 매우 책임있는 산문체를 사용하였다.”(Kneller, 1971[1990]: 97~98).

9. 본질과 당위가 아닌 외양과 결과. Sosein의 파악이 아닌 Dasein의 변혁. 이론에서 실천으로. 도덕이 아닌 윤리의 시대, 실존이 본질에 앞서다. “여기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먼저 인간은 존재하고, 출생하고, 현장에 나타나고, 그리고 오직 그 이후에만 그 자신을 분명히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존주의자의 견해처럼 인간이 불확정적 존재라면, 그것은 인간이 처음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을 확정한 이후에만 어떤 존재로 될 것이며, 미래의 그의 모습은 그 자신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 인간은 그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상상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그의 상상이 바로 실존에로 추진된 후에 형성될 그 자신의 모습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형성한 존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Sartre, 1947: 18)

10. “1989년 이후 나는 변했다. 그때까지 나는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이나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 비판은 그들이 계속해서 강고하게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들이 존속하는 한 단지 그것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무언가를 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이 붕괴했을 때 나는 역설적이게도 나 자신이 그들에게 의존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뭔가 적극적인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칸트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그때부터였다.”(18~19) “1990년까지 나는 적극적인 말이라면 어떤 발언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 후로 자본제 경제나 국가에 대한 계몽적 비판 또는 문화적 저항에 머무르는 데 만족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 하는 과정에서 칸트를 만났다. … 나는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이론을 제출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전의 책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이론을 제출할 때는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누구도 트집을 잡을 수 없는 범위에 그친다면 아카데믹한 책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柄谷行人, 2001[2005]: 12)

: 3:49 am: bluemosesErudition

“탈문화화는 역사, 역사의식, 전통과의 연관성의 결핍과 관련 있으며, 개인이 전통에서 분리되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고, 자신이 딛고선 자리와 다른 이와의 관계를 알기 힘들 뿐 아니라, 아주 값싼 형태의 순응에 빠져든다.”

“저는 처음에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문제를 가능한 진리로서 다시 제기하는 그의 고독한 용기에 매료되었습니다. 저 역시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도덕과 정치를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타당한 중간고리를 제공해준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러한 점에 매료되었습니다. 또 다른 점은 그가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과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 사물들을 보는 능력에 매료되었습니다. 사물을 구성하거나 상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가 피상적으로 빠르게 읽었던 텍스트들 속에서 사물을 보고, 보이는 그대로의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후로 계속 그를 만났는데, 그보다 똑똑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었습니다.”

: 3:33 am: bluemosesErudition

‘강의’는 ‘논고’다. 따라서 ‘종강’은 ‘탈고’다. CP: 교육과 사회, 윤리의 변혁.

: 3:22 am: bluemosesErudition

“동아시아 국가는 교육의 목적을 국가의 번영과 함께 경쟁을 통한 개인의 사회이동에 두었다. 국익 중심의 국가주의와 이기적인 개인경쟁은 동아시아형 교육의 압축된 근대화의 양축이었다. 이 구조 속에서 탈락해 버리는 것이 교육의 공공성이다. 왜냐하면 공공권은 본래 국가와 개인의 중간지대인 사회권(society), 그 중에서도 자립한 개개인이 서로 원조-협력하는 협동사회(association)를 기반으로하여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佐藤 學, 2001[2003]): 43~44)

‘교육이 삶의 원형상(Urphänomen)’이라는 명제를 수용한다면, 교육과 사회의 접점인 학습의 원형은 association이다. 인간의 학습은 사회의 근간인 공공성 속에서 전개되며, 그 공공성을 일컬어 윤리(sittlichkeit)라 할 수 있다. ‘어떤 윤리인가’는 ‘어떤 공공성인가’에 의해 규정된다. 사토 마나부가 지적한, 국가와 개인 가운데 사상된 공공성은 - 공공성 그 자체가 아니라 - 전체주의(모래알의 시멘트화)에 의해 소실된 연대와 유대의 덕이다. 승패와 우열의 위계로 구축된 공공성은 공생과 공락의 경계를 배제한다. 차이가 곧 이윤이기 때문이다.

: 2:51 am: bluemosesErudition

어려운 상황을 냉소로 극복하려다 보면 의욕과 총기도 함께 사라진다. 잃어버린 게 많다고 느낄 때 냉소적이 되면 잃는 게 더 많아지는 것이다. 냉소와 관조를 혼동하지 말 것.”(dertext) _ 동의한다.

“혼자서 자기 신변을 반추하는 블로그는 사적인 느낌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솔직한 ‘고백’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현실 포장일 가능성이 많다.”(dertext) _ 공감한다. 

“신변잡기 개인 블로그에 거부감이 드는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아무에게나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자신이 어떤사람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블로거의 글이나 사진은, 공공장소에서 거울보며 열씸 화장하는 여자처럼 부담스러워요. 자신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아도, 객체화된 정신 등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게 내공을 쌓는 길 같아요.”(dertext) _ 반성한다.

: 2:43 am: bluemosesErudition

“신화(神化, 고귀한 삶)와 물화(物化, 천박한 삶)의 대립이라는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고대와 근현대의 주요 고전을 선정하여, 텍스트 안팎의 역사와 사상을 종횡으로 엮어 일종의 ‘메타텍스트’를 만들려 하였습니다.” _ ‘일관된 주제의식’의 유무에 따라 저술과 편집이 구분된다.

: 1:37 am: bluemosesErudition

내 안의 우상은 아내고, 그 신전은 가정이다. 무능함에 열등감을, 속상함에 교만함을 절감한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