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려 말고 바르게 하라.”(평택 참사랑교회, 김기태)
(사적 주체의 지배 하에 상품의 생산과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를 극복하지 않고는 진보고 좌파고 다 헛소리다. 극복은 전면폐지를 의미하는게 아니며 … 시장경제와 시장사회가 아닌 다른 원리가 중심이 되는 경제와 사회를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pepe)
* 탐욕을 방치한 채, 개명된 이기심의 반사회적 사회성을 기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 모두를 금권력이 동등한 게임판에 옮겨 놓을 때 가능하다.
“일단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설교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위대한 신비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복음의 선포를 듣기 위하여 함께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그 분위기 자체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M. Lloyd-Jones, 1971: 43)
* 교육에서 연극으로(DIE) 연극에서 교육으로(TIE) 무대와 객석의 합일을 지향하는 교육연극의 목적은 소외의 회복, 즉 ‘치유’이다.
1. “사람들이 수치화, 계량화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 속도를 수치화하는 건 쉬운 문제 같은가? 운동에너지가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수치화하는 건 단순한 문제 같은가? 온도를 온도계로 나타내는 건 단순한 문제 같은가?”
2. “자연에 절대량이라는 걸 상정할 수 없던 시절, 어떻게 하여 표준화된 양화가 가능해졌을까요? 라부아지에로 상징되는 양팔저울입니다. … 화학은 기본적으로 절대량보다는 상대량을 출발로 해서 차근차근 관계를 구축해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론이야 어떻건 실천적 차원에서는 애초부터 반토대주의적이었지요. 전류/전압계, 온도계 등등이 그런 산물.”
3. “재현성의 관건은 근본적으로 기구나 장비의 표준화가 가장 핵심적입니다. 그리고 이건 다시 사회(학)적인 현상이지요.”
“공간과 몸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가? 그 관계는 상호적인가 아니면 일방적인가? … 메를로퐁티는 세계와 인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몸을 통해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려 했고, 푸코는 인간이 어떻게 주체가 되는지를 ‘계보학적으로’ 기술하려고 했다.” _ 강미라(2008). 메를로-퐁티의 ‘몸-주체’와 푸코의 ‘몸-권력’ 비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
1. “‘학살자들의 이야기’ 같은 주제를 다루는 역사 서술은 관련자들을 단순히 악마적 존재로 규정하는 어떠한 시도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집단 학살을 자행하고 강제이송을 담당했던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이 작전에 참가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거나 은밀하게 회피했던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었다. 따라서 내가 모든 학살자나 회피자의 행위를 최대한 이해하고 설명하기를 원한다면 동일한 상황에서 스스로 학살자 또는 회피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 범죄자들을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는 홀로코스트 학살자들을 깊이 있게 다루는 어떠한 역사 연구도 불가능할 것이다. 유대계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나치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 이렇게 썼다. ‘우리의 연구를 이끄는 목표는 결국 오직 한 단어 이해understanding이다.’ 나는 바로 이 정신에 입각해서 이 책을 집필하고자 했다.”(Christopher R. Browning)
2. 브라우닝(1992)은 “101 예비경찰대대의 사례를 통해 홀로코스트가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거나 반(反) 유대 정서를 내면화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말한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라면 누구라도 101 예비경찰대대의 대원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6년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다니엘 요나 골드하겐은 <히틀러의 자발적인 학살자들 Hitler’s Willing Executioners>에서 브라우닝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며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에 대한 충격적인 해석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학계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브라우닝과 똑같이 101 예비경찰대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골드하겐의 결론은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골드하겐은 101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독일인들’의 표본이라고 주장했다. 즉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오래 전부터 이른바 “몰살추구적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으며, (브라우닝이 밝혀낸 바) 학살 임무를 거부할 수도 있었던 그들이 전문 살인자가 된 것은 (특수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골드하겐에 따르면 그들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은 ‘최종해결’ 과정에서 극도로 잔인하게 발현됐다. 브라우닝 또한 골드하겐의 주장을 반박했는데 그 구체적인 근거를 1998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재판을 출간하며 후기(283~335쪽 참조)의 형태로 정리하여 실었다. 브라우닝은 골드하겐의 사료 이용의 문제점과 논지 전개의 취약성을 조목조목 밝혀내며, 무엇보다 그가 홀로코스트를 과거의 일회적이고 주변적인 사건으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오늘날의 세계에 미치는 중요한 문제의식까지 간과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3. “홀로코스트의 중심지 폴란드에서는 이른바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방침에 따라 1942년 3월부터 1943년 2월까지 단 11개월 동안 거의 모든 유대인이 현지에서 학살되거나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다. 그런데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매우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거주지는 대부분 소도시나 시골이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의문을 가졌다.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이 시기에 독일이 조직적으로, 신속하게 유대인 집단 학살을 수행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며, 인력은 어떻게 조달했는가? 수용소 유지에 필요한 인력은 소수였지만, 각 지역의 유대인을 집결시켜 수용소로 이송하거나 현장에서 사살하는 작전은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 101 예비경찰대대는 1942년 독일군의 후방 지원 임무를 띠고 폴란드에 투입되어 1943년까지 약 38,000명의 폴란드 유대인을 학살하고, 약 45,200명을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01예비경찰대대가 집단 학살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대의 구성원 대부분은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으며 하층 계급 노동자 출신의 중년 남성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치의 이념과는 다른 정치적 가치들과 도덕규범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가장 덜 나치화된 지역으로 명성 있던 함부르크 출신이었으며 다수는 정치문화적으로 반(反) 나치 정서를 갖고 있던 사회계급 출신이었다.’(84쪽) 하지만 대원들은 몇 차례의 학살과 게토 소개疏開 작업을 수행하면서 학살 임무에 익숙해졌고,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무엇이 이 평범한 사람들을 전문 살인자로 만들었을까? 저자의 답은 담담하면서도 자못 충격적이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나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지도, 반유대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환경’이었다.”
4. “101 예비경찰대대가 폴란드에 투입된 뒤 대대장은 모든 대원들에게 유대인 사살 임무를 설명한 뒤 ‘특별한 제안’을 했다.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대원은 빠져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때 약 500명의 대원 가운데 대대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단 10명 혹은 12명뿐이었다. 그들은 임무에서 제외되었고 별다른 징계 처분을 받지 않았다. 물론 학살이 진행되면서 상당수의 대원들이 충격과 공포, 죄의식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임무 면제를 신청했다. 일부러 사격을 엉터리로 하거나, 상관의 눈을 피해 숨는 대원들도 많았다. 하지만 임무를 거부하거나 회피한 대원 가운데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즉 이들에게는 학살에 가담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90퍼센트의 대원들은 - 적어도 초기에는 -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 학살을 계속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공개적으로 비동조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의 능력 밖에 있었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웠다.(275쪽) … 동조同調는 101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집단행동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분석 틀로 작용한다. 대원들은 동료나 상관에게 ‘사나이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들은 ‘체면’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저자는 유명한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의 결과를 중요한 예로 든다. 물론 500명에 달하는 대원들의 학살 동기를 한 가지 측면으로 해석하는 데는 제한이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설명 모델만 해도 전시 야만화, 인종주의, 임무의 분업화와 관례화, 학살자의 특별 선발, 출세주의, 맹목적인 복종과 권력에 대한 경의, 이데올로기적 세뇌, 동료 집단에 대한 동조 등 수없이 많다(237~282쪽). 하지만 이 가운데 101 예비경찰대대에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은 하나도 없다. 학살이 무조건 강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대원들의 80~90퍼센트가 어쨌든 ‘자의로’ 학살에 가담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아니라 특수한 환경의 지배를 받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 동조(Peer Pressure)와 방전(Entladung) _ “Why Did Ordinary People Help the Nazis? … Browning pointed out that peer pressure radically affects behavior and sets moral norms. His final question was: ‘If the men of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could kill under certain circumstances, what group of men could not?’”
«히틀러 국가: 나치 정치혁명의 이념과 현실»의 역자 김학이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출간되어 있는 수많은 나치즘 관련 서적 가운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책은 딱 여섯 권뿐이다: 이 책 <히틀러 국가>, 티모시 메이슨의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데틀레프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 이언 커쇼의 <히틀러>. …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책들을 읽는 순서가 있다는 점이다. 맨 먼저 읽어야 할 책이 이 책 <히틀러 국가>이다. 그 다음은 티모시 메이슨의 책, 포이케르트의 책, 힐베르크의 책, 브라우닝의 책, 커쇼의 책 순이다. 메이슨의 연구는 이 책의 테제를 노동 부문에 창조적으로 적용시킨 것이고, 포이케르트는 브로샤트의 학문적 동지인 한스 몸젠의 제자로서 브로샤트가 이끌던 일상사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에 브로샤트의 테제를 일상사적으로 수정한 사람이며, 커쇼는 브로샤트의 영국인 제자로서 브로샤트 테제를 히틀러 숭배 현상에 대입한 역사가이고, 힐베르크는 학문적으로 브로샤트와 무관하지만 그의 스승인 프란츠 노이만과 한스 로젠베르크는 브로샤트의 지적 선배이며, 브라우닝은 힐베르크의 학문적 제자다. 시기적으로도 브로샤트와 힐베르크는 1960년대, 메이슨은 1970년대, 포이케르트는 1980년대, 브라우닝은 1990년대, 커쇼는 2000년대다. 이 여섯 권을 읽은 독자가 다른 책들을 읽으면, 그 책이 무엇과 대결하고 있는지, 그 대결이 성공했는지, 브로샤트가 어떻게 공격받는지, 현재 브로샤트는 어느 정도 수정되고 있는지 쉽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 결정판은, 이언 커쇼의 <히틀러>이다. 로저 그리핀(Roger Griffin)은 거명되지 않았다.
“1924년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1942년 영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47년에는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서 자원봉사단의 일원으로 철도부설 사업에 참여했다. 학부 과정만 마친 그가 역사가 수업을 쌓은 것은 1946년 영국 공산당 내에 구성된 ‘역사학자 모임’에서였다. 그는 이 모임에서 유수한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며 도나 토어 등의 지적 영향을 받았다. 그가 쓴 첫 역사서는 <윌리엄 모리스, 낭만주의자로부터 혁명가로>(1955)였다. 1956년 그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 이후 영국 공산당을 탈당했고 이 무렵부터 좌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스딸린주의 경향과 싸우며 반핵운동에도 깊이 간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7년 [New Reasoner]지와 1960년 [New Left Review]지를 창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63년 자신의 주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출간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워릭대학 교수를 지낸 외에 평생 자유로운 저술가이자 운동가로 지냈던 그는 18세기 영국 민중사연구의 일환으로 <휘그파와 사냥꾼들(Whigs and Hunters: The Origin of the Black Act)>(1975)을 비롯한 여러 저작들을 내놓았고, 1970년대 말 알뛰쎄르를 비판하는 <이론의 빈곤>(1978)을 썼다. 1980년대 들어 그는 반핵 평화운동을 주도해 냉전체제의 일각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으며 1993년 8월 자신의 글을 모은 책 <역사를 만듦>(1994)의 짤막한 머리말을 쓰는 것으로 집필생활을 마감한 뒤 작고하였다. 1980년대 Arts and Humanities Citation Index에 따르면 그는 20세기 역사가 가운데 가장 널리 인용된 역사가였으며,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250명의 저자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