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과 [수량화된] 획일성을 혼동하는 이가 대다수이다.
긍정, 힐링, 멘토. 우리 시대의 팡글로스에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의 일독을 권한다.
충청, 스윙지역, 캐스팅보트, “6월1일 충남 아산시. 복기왕 아산시장 후보가 안 후보를 수행하며 “도지사 오셨습니다!”를 외치자, 안 후보가 등을 툭 치며 ‘그런 것 좀 하지 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기왕 후보는 멋쩍게 소개를 그만뒀다. “요란 떨지 말자”는 안희정 캠페인을 관통하는 정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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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t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with knowledge and all discernment, so that you may approve what is excellent, and so be pure and blameless for the day of Christ,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 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가설] 학교가 다양할수록 아이들은 획일화 된다. 왜? 작금의 다양화는 횡적 분화가 아닌 종적 구분이요, 그 면면은 특정한 계층으로의 수렴이기 때문이다. 고로, 좋은 학교 만들기는 일개 학교의 노고로 가당치 않다. 그것은 폐허에서 숲을 이루는 일이다. 공동 가치의 변혁 없이 좋은 학교를 만든다는 것은 언제나 이미 최상위를 향한 격정의 표출 아닌가. 자못 궁금하다. 공동 가치는 어떻게 혁신하는가. 동시다발적으로 묘목을 기르기 위한 인큐베이터 정책이 필요한 것인가. 아님, 예산 지원으로 상급학교의 입학전형을 견인하는 것인가. 이상은 동일한데 다른 방식으로 도달하게 하면 해결될까. 인재란 누구이고, 공부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