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6th, 2014

June 6, 2014: 9:59 pm: bluemosesErudition

“인문학 공부는 어떤 분야에서 시작하여도 무방하겠지만, 저는 역사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형성된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 즉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자신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대한 역사적 통찰이 있어야만 인문학 공부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강유원, 2012: 14)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오늘을 사는 인간의 삶이 과거로부터 전해진 수많은 유산들 위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하면서 얻게 되는 첫째 성취는 바로 이것입니다. … 역사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일체가 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대해서 반성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서 한걸음 물러나 과연 그 사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의 의미는 어떠한지 등을 따져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색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생각해 보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역사 공부의 둘째 성과입니다. …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단계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구조 속의 행위자들이 어떻게 행위하는지에 따라 그 경로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철저하게 가지고 일종의 ‘역사 창조자’로서 행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역사 공부의 셋째 성과는 여기에 있습니다.”(강유원, 2012: 470)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고 이야기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집적으로서의 우리의 현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사회구성원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이해,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전망, 국제정치학적 지식과 지정학적 통찰 등이 앞으로의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내놓는 말입니다.”(강유원, 2012: 471)

: 2:20 pm: bluemosesErudition

“‘대안이 없다’는 말은 그런 곤혹으로부터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구출한다. 그 말을 풀면 이렇다. ‘나는 진심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걸 구현할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대안이 없다’는 말은 과연 대안에 대한 갈망이 담긴 말일까? 짐짓 대안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말은 아닐까? ‘대안이 없다’는 말은 실은 대안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안에 대한 태도에 관한 말이다. ‘대안이 없다’는 말엔 대안에 대한 피동적 태도, 대안이 이미 차려진 혹은 남이 차려주는 메뉴에서 고르는 것이라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대안은 ‘아직 차려지지 않은 것’이며, ‘나의 주체적 참여와 행동으로부터 차려지는 것’이다. 대안에 대한 태도를 전환하지 않는 한, ‘대안이 없다’는 말은 대안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말일 뿐이다. 또한 ‘대안이 없다’는 말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쓰고 싸워온 사람들과 실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외면한다. 대기업 정규직 위주가 아니라 비정규 불안정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 환경오염이라는 피상적 접근이 아닌 생태계 전체의 문제를 자본주의의 파괴적 속성과 결부시키는 급진적 생태운동, 동정과 시혜가 아니라 인간해방의 관점에 선 장애인 소수자 인권운동 등, 허다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라도 존경을 표시하고 연대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김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