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September 22nd, 2014

September 22, 2014: 11:56 pm: bluemosesErudition

성숙은 이타심을 구현하는 능력이다. 손해를 감수하는 아량은 어디서 오는가.

: 11:43 pm: bluemosesErudition

잔고가 바닥나면 우울하나, 영성은 황폐해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는 유물론자이다.

: 11:23 pm: bluemosesErudition

대중의 울분이 어느덧 흩어져 소실되고, 저마다 지금 여기의 편익에 목숨을 건다. 항산 없이 운동은 불가하기에.

: 11:03 pm: bluemosesErudition

왜 공동체인가. 그것의 존재이유는 타자의 유익에 있다. 이타심이 결여된 결사체는 응집된 폭력을 기어코 행사한다.

: 10:52 pm: bluemosesErudition

열린 질문, 닫힌 정답

: 3:33 pm: bluemosesErudition

“헤겔의 이런 관점은 자신의 체계를 전제한 뒤 이를 스피노자에게 투사한, 덮어씌운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런 체계 속의 부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스피노자를 터무니없이 오독한 결과이다. 하나의 중대한 사례를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명제에서 찾을 수 있다. 헤겔은 스피노자에게서 찾아낸 이 명제를 놓고, ‘위대한 것을 예고하는 문장’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명제에 머물러 있을 뿐, 그 부정의 지양을 생각하지 못한다. 헤겔은 모든 규정이 그 안에 자기부정적 계기를 품고 있어서 그 부정을 통해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스피노자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스피노자다. 스피노자가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유의 힘을 실어 표명한 ‘규정 명제’는 ‘코나투스’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의 주요 저작 <윤리학>에서 밝힌 코나투스(무의식적인 자기보존 충동)는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본질로 한다’는 뜻으로 요약되는 개념이다. 이런 규정에서 모든 존재가 하나의 거대한 체계의 일부를 이루는 헤겔식의 사유와는 전혀 다른, 개별적 존재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명섭)

: 12:45 pm: bluemosesErudition

지하철 환승역에서 추악한 행위를 목격하였다. 이곳도 점차 소돔과 고모라로 치닫고 있다. 내면에 파고드는 세속의 정욕을 태만하게 여기지 않는가. 그 댓가는 몰락이다.

: 11:26 am: bluemosesErudition

Proverbs 19:20-21 ESV

Listen to advice and accept instruction, that you may gain wisdom in the future. Many are the plans in the mind of a man, but it is the purpose of the Lord that will stand.

: 2:19 am: bluemosesErudition

목표는 수준이고, 목적은 정당성이다.

: 2:17 am: bluemosesErudition

1. 출근길에 더러 노상 전도를 목도한다. 어쩌다 한 번 동원된 전도대는 사명감으로 충만하다.

2. 건네는 종이를 사양한다. 등 뒤에서 볼멘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전도가 세계관의 전복임을, 그리고 그것은 두터운 신뢰가 전제되어야 함을 모른다.

3. 개신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서 미련한 것을 미련하게 전하니 애석하다. 일상과 괴리된 반나절의 열심이 뭇 사람의 냉담을 돋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