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엽적인 사안을 중차대한 문제라 아우성치며, 조직을 위태롭게 하더라도 제 입지를 돋우려는 심보가 애석하다. ‘철없이 기다리지 못해 송구하다’, 이것이 당연한 반응인데 그렇지 않다. 성숙한 미성숙에 분노가 인다. 한심하다.
공감과 장단 맞추기는 다르다. 또 초탈과 무시하는 것은 다르다. 어떻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것인가. 뚝심을 갖고 성인아이를 존중하며 ‘그럼에도 그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교만 즉 나르시시즘을 벗겨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