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무의 병법 13편
프로이트에게는 무엇보다도 꿈의 존재가 무의식의 명백한 증거이자 무의식의 활동을 추적해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매일매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상영되는 꿈이라는 드라마의 연출가가 바로 무의식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두자. 무의식은 꿈이 아니라 그 꿈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꿈 자체가 무의식이라는 생각은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꿈이 무의식이 아닌 것은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이 해몽 체계가 아닌 것과 같다. 꿈은 다만 무의식을 위한 극장일 뿐이다.
무의식을 규정함에 있어, 단지 의식의 표면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속성만을 지칭하여 무의식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억압과 자체 검열에 의해 통상적인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지금 의식 속에서 활동하지는 않고 있지만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 의식에 떠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프로이트의 용어에 따르면 전의식이다. 이에 비해 무의식은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 억제되어 있어, 우리로서는 쉽게 접근하거나 확인해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컴퓨터에서 현재 작동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나 파일이 의식이라면, 현재 가동되지는 않고 있으나 하드에 저장되어 있어 불러내고 싶으면 언제든지 화면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는 파일이나 프로그램은 전의식이다. 이에 비해 무의식은 지워져버리거나 덧씌워져버린 파일들이다. 이들은 보통 방법으로는 불러내기 어렵고, 아주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가까스로 복구를 시도해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처럼 그 어떤 이유로 인해,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의 영역이 무의식이다. 말을 바꾸자면, 내면화된 금지와 억압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무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_ 서영채, 인문학 개념정원, 문학동네, 2013, 30~31쪽.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적 틀은 지형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무의식, 의식, 전의식’의 틀이 첫 번째 시기의 것이고, 1920년대 초기에 새로이 도입된 모델 ‘이드, 자아, 초자아’의 체계가 두 번째 시기의 것이다. 첫 번째 시기의 지형학에서는 쾌락원칙에 따라 자유롭게 유동하는 정신적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는 무의식과, 현실원칙에 따라 에너지를 구속하고 통제함으로써 형성되는 의식의 구분이, 그리고 각각의 작동방식에 대한 해명이 중요한 요소였다. 이에 비해 두 번째 지형학에서는,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분되어 있는 정신의 세 요소의 상호작용과 역학관계가 좀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힘의 저장고로서 이드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재판관처럼 자아를 감시하고 압박하는 초자아가 있다.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밀려오는 이 두 개의 난폭한 힘을 제어하고 방어하여 현실에 맞게 순화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 자아이다. 이 세 영역의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두 번째 시기의 지형학이다.
_ 서영채, 인문학 개념정원, 문학동네, 2013, 32~33쪽.
“88 올림픽 당시에는 풍속영업규제를 완화하고, 성산업 지역 중심의 관광 서비스 제공을 국가에서 부추기기도 했습니다.”
“가정폭력은 가족 구성원 간의 힘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일어나며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피해를 주는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동안 장기결석과 학업중단으로 인한 학교 밖 청소년은 5만1906명이며 질병, 해외출국을 제외한 부적응 사유 학업중단은 2만8502명이다. 의무화한 학업중단 숙려제도 등으로 감소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매년 5만∼6만 명의 학업중단 청소년이 생기고 그 절반 이상이 학교를 떠난다는 것이다. 또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학령인구 687만 명 중 청소년은 37만 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 여전히 실태가 확인되지 않는, ‘비자발적 학업중단’ 학교 밖 청소년이 어림잡아 2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제 ‘학교 밖 청소년 지원 법률’이 시행되었고,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가 본격 활동을 시작하면 ‘모르는 것’이 줄어들 것이다.”
“서울대의 전후 재건사업은 미국 미네소타대학이 주관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도움이 컸다. 이 프로젝트로 1954년부터 196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약 980만 달러를 원조 받았다. 특히 교수진 재교육의 성과가 컸다. 인재 양성 계획을 통해 서울대 교수 218명이 미네소타 대학에서 유학을 했다.”
“1970년대의 가장 큰 사건은 관악캠퍼스로의 이전이다. 초기 서울대는 대학본부와 문리대·법대는 동숭동에, 상대는 종암동에, 사범대와 공대는 각각 용두동, 공릉동에 자리 잡는 등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지리적 분산은 서울대를 종합대학교가 아닌 연립대학으로 만든다는 비판이 많았다. 정부는 1970년 새 캠퍼스의 통합 이전 부지로 서울 근교 관악산 서북지역 330만㎡(100만평)를 정해 발표했다. 1975년 3월 이전한 관악캠퍼스에서 첫 입학식이 열렸다.”
“서울대는 2000년대 들어 인사 및 재정의 자율권을 부여한다는 취지로 법인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대학 자율성과 재정 안정성을 해친다는 학내외 반대가 있었지만 서울대는 2011년 말 법인화 절차를 완료했다. 식민지 폐허 위에서 시작한 서울대는 70년 만에 16개 단과대, 12개 대학원을 갖춘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대학으로 성장했다. 현재 서울대 재학생은 학부생 2만 명, 대학원생(석·박사 과정) 1만3000명이 넘는다. 전임교수도 2100여명에 이른다.”
마르틴 브로샤트, 조지 모스,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티모시 메이슨, 라울 힐베르크, 크리스토퍼 브라우닝, 이안 커쇼(+ 마루야마 마사오, 후지타 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