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언행 자제, 2차 피해 유의
“뚝심을 갖고 성인아이를 존중하며 ‘그럼에도 그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교만 즉 나르시시즘을 벗겨내는 길이다.” 즉,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 불가하다, 성령의 충만함 임재 없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 그리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포획되면 “늘 불만에 투덜거리면서 이른바 ‘남을 위해 사는 사람’ - 자신을 마치 순교자처럼 생각하면서 남들이 이런 희생을 왜 항상, 또 좀더 몰라주는지 이상히 여기는 사람 - 이 되”고 만다.
주님과 하나되는 길은 언제나 이미 자기부인에서 시작한다. 자기부인은 성화의 종국이 아니라 초입이다. 자기부인의 방도로, 오웬은 죄죽임을 권고하고 루박은 임재의식을 권면한다. 어쩌면 해답은 명확하다. 다만 그것을 단행할 힘과 의지가 미약하다.
(위의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 없이 디아코니아만 연신 강조하면, 가나안 성도는 좌절 뿐만 아니라 냉소까지 품게 될 것이다. 강단의 이율배반을환멸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