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Not a Novel
기만은 성찰이 결여된 모순의 정당화다. 누가복음의 안식일 논쟁에서 알 수 있듯, 제도는 인위를 본질로 승격하여 진리를 곡해한다. 성서는 누구를 영적 아비라 하는가, 또 누구에게 디다케를 권고하는가. 교회는 1517년 교황의 통치에서 목사의 치리로 분권되었을 뿐인가.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일침을 상기해야 한다. 가나안 성도의 엑소더스를 보라.
“For though you have countless guides in Christ, you do not have many fathers. For I became your father in Christ Jesus through the gospel. I urge you, then, be imitators of me.”(1 Corinthians 4:15-16)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And behold, I am with you always, to the end of the age.”(Matthew 28:19-20)
1. 비아냥은, 사슬에 묶인 사자의 포효이다. 이것을 견디려 하면 승산이 낮다. 자기부인이 답이다. 죽은 자아는 요동하지 않는다.
2. 긍정의 힘을 신앙이라 하지 않는 까닭은, 자기 욕망을 신적 섭리로 왜곡하기에 그러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상에게 복채를 주면 복을 받는다’는 샤머니즘의 일환이다.
“아이를 위해 노력하되 자신을 위한 ‘원기를 회복하는 틈새’를 꼭 찾아야 한다. 숨 쉴 공간을 찾아야 스퀘어펙 아이와 씨름할 힘도 생긴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의 절대량은 중요하지 않다. 내 아버지는 낮엔 일하고 밤엔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난 어린 시절을 기억할 때마다 매일 밤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내가 그런 것처럼 당신의 아이도 그렇게 느끼는 게 중요하다. 최신 뇌과학은 아빠와 돈독한 아이가 문제해결 능력과 충동조절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로컬 칼리지 시절 아버클 교수는 로즈를 신뢰했으며 타인에게도 늘 로즈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했다. 학업에 문제가 생기면 ‘토드, 이건 너답지 않아’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 있어 ‘나다운 것’이 처음으로 긍정적으로 정의되는 순간이었다. 가족 외식으로 수업에 빠진 적이 있는데 교수는 ‘토드가 빠질 리 없는데 걱정’이라며 휴강을 결정했다. 로즈는 그런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그런 피드백의 선순환이 로즈를 하버드로 이끌었다.”
_ Todd Rose, <나는 사고뭉치였습니다>, 문학동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