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15th, 2016

January 15, 2016: 9:56 pm: bluemosesErudition

Q. 전반적으로 학업성취도는 높게 나오지 않나.

A. “공교육 시스템 덕분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선생님들의 자질이 우수하다. 선생님들이 지역, 계층 편중 없이 골고루 배치되는 걸 보고 다른 나라에서 부러워한다. 아직까지는 교사와 학교에 대한 존중 분위기도 남아 있는 편이다. 물론 점점 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학생들도 공적 책임감이 강하다. 다른 나라 학생들은 ‘나라 대표해서 시험 본다’고 하면 거부감부터 나타내는데 우리 학생들은 결사적으로 임한다.”

Q. 책에서 평균 점수는 높지만 두드러지게 우수한 학생은 없다고 지적했다.

A.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의 특징이다. 평균은 높지만 최상층이 많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식정보사회를 이끌 개발·생산자는 적고, 고도의 지식정보 상품을 빨리 소비할 층이 넓다는 의미다. 정보통신기술 산업 제품을 소비할 ‘얼리어답터’는 많은데 개발자는 적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 미국, 독일은 전체 평균은 낮아도 최상층 비율이 높다.”

_ 권재원, 그 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 11:40 am: bluemosesErudition

1. 마음, 표상, 신학인간학, 프로이트

2. 케노시스, 성화, 자기부인, 루이스

: 11:20 am: bluemosesErudition

01.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요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객관이나 직관의 형식에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인간의 감성적 활동,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의 대립 속에서 관념론에 의해 전개되거니와, [이는] 추상적일 뿐이요, [여기서] 관념론은 당연히 현실적인 감성적인 활동 자체를 알지 못한다. 포이어바흐는 사유의 객관들과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감성적 객관에 호소하지만 그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 태도로 간주하고, 그에 반해서 실천은 그 추잡한 유대인적 현상 형식에서 파악되고 고정될 뿐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혁명적”, “실천적ㆍ비판적” 활동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02.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귀속되는가 하는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 속에서 진리, 다시 말해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에 고립된 사유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인 문제이다.

03. 인간은 사태와 교육의 산물이며, 그에 따라 변화된 인간은 사태와 변경된 교육된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사태가 바로 인간에 의해 변화된다는 것과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 학설은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되는 데, 그 중 하나는 사회를 넘어서 있다.(예를 들면 로버트 오웬의 경우.)

04.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 종교적으로 표상된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의 세계의 이중화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노고는 종교적 세계를 세속적 기초로 해소한 데에 있다. 그는 이 일을 끝낸 후 주요한 일이 아직 완수되지 않고 남아 있음을 간과한다. 세속적 기초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를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 영역으로 고정시킨다는 사실은 이러한 세속적 기초의 자기 분열과 자기 모순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자[세속적 기초] 자체는 우선 그 모순에 있어 이해되어야만 하고, 그런 다음에는 모순의 제거를 통해 실천적으로 혁명화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세속적 가족이 신성한 가족의 비밀로 폭로된 다음, 이제는 전자[세속적 가족] 자체가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전복되어야만 한다.

05.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는 포이어바흐는 감성적 직관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인간적ㆍ감성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0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해소한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개별적 개체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결코 아니다. 그 현실에 있어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현실적 본질의 비판으로 들어가지 않는 포이어바흐는: 1) 역사적 과정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정을 그 자체로 고정시키며 하나의 추상적 - 고립된 - 인간 개인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2) 그런 까닭에 본질은 “유類”로서만, 내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단순히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보편성으로만 파악될 수 밖에 없다.

07. 그런 까닭에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체가 현실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사회 형태에 속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08. 사회적 삶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끌고 가는 모든 신비는 인간의 실천과 이 실천의 개념적 파악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발견한다.

09. 직관하는 유물론, 다시 말해서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귀결되는 최고의 정점은 “시민사회”에서의 각각의 개인들의 직관이다.

10. 낡은 유물론의 입각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각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화된 인류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칼 마르크스 지음, 프리드리히 엥겔스 편집, 1845(1888) _ “성급하게 작성한 것이며, 결코 출판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맹아를 내포한 최초의 문헌”

: 11:14 am: bluemosesErudition

<기독교의 본질>에서 그의 주요 명제는, 종교는 단지 인간의 필요를 투사한 것이며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소망의 충족이라는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자기 책의 목적을 “환상의 파괴“라고 썼다. 그는 결론에서 자신의 연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종교의 실체와 대상이 전적으로 인간임을 밝혔다. 신적 지혜는 인간의 지혜임을, 신학의 비밀은 인류학임을, 절대 정신은 소위 유한한 주관적 정신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