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독해의 지표로 삼은 것은 엔서(Ensor)가 1939년 영국 국립 국제관계연구소에서 행한 연설 중의 한마디다: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고해서 그것이 곧 논리 자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레고어에 따르면 우리는 “히틀러의 글에서 19세기와 20세기의 여러 작가, 정치가, 철학자의 사상의 메아리를 힘들지 않게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아리들은 언제나 공허하고 절반만 이해된 것”이다. 이는 히틀러의 독서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팸플릿이나 신문, 강연, 대화 등에서 간접적으로 지식”을 얻었으며, 책을 읽는다해도 “지식인의 열린 마음으로 … 읽지 않고, 자기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만 읽었다.” 그는 이렇게 대강 어설프게 읽은 것을 가슴 속에서 버무려 말로 뱉어냈으며, 그것을 받아쓰게 하여 <<나의 투쟁>>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의 투쟁>>은 1923년 히틀러가 ‘맥주집 반란’의 실패로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갇혀있던 기간에 구상되어 그가 서기에게 불러준 것이 1925년, 1926년에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출간되었다. <<나의 투쟁>>과 관련된 이 두 가지 사실, 즉 그 책의 집필 과정과 구상 및 출간 시점은 이 텍스트를 독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맥주집 반란은 실패한 거사였지만 요하힘 페스트의 지적처럼 “히틀러 자신과 그의 당 역사에도 … 하나의 전환점”이었으며, “현대 국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전망없는 일이며 권력장악은 헌법의 토대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히틀러 평전>>) 그런데 히틀러는 이것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커쇼는 히틀러가 이때부터 “자신만이 독일의 위대한 지도자라 믿게” 되었으며, 동시에 “일부 당원들도 그를 나폴레옹과 비교하고, 독일의 무솔리니로 묘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나치당의 “히틀러 숭배의식”은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이는 차츰 “히틀러의 공적인 이미지에 대한 능동적인 조작”과 “독일인들의 수용성”, 즉 “정치적 지도력에 대한 ‘초인’ 이미지를 받아들일 조건을 갖추고 있던 사회적-정치적 구조, 가치체계, 그리고 ‘심성구조’”가 결합된 히틀러 신화로 구축되기에 이른다. 그런 까닭에 <<나의 투쟁>>은 “극우파 사이에서 히틀러가 가장 역동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과격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극단주의자들의 영역에서 지도권을 차지하려는 그의 노력을 뒷받침하도록 의도된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나의 투쟁>> 두 번째 권이 출간된 1926년에 나치당은 ‘Heil Hitler’를 도입한다. 이로써 공적인 차원에서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면모가 뚜렷해졌다.
_ 강유원, 2015.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