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18th, 2016

June 18, 2016: 1:39 pm: bluemosesErudition

개인적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은 모르는 사이에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게 된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은, 몽테스키외가 금전욕이 아닌 명예욕과 관련하여 제시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군주정치에 있어서 명예욕은 “정치체의 모든 부분을 활성화시키고 결과적으로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공공의 복리에 공헌하게 된다.”

: 1:38 pm: bluemosesErudition

“모든 인류를 타락에 이르게 하는 잔혹함, 탐욕, 야망이라는 세 가지 죄악으로부터 국방, 상거래, 정치가 이루어지고 이로부터 힘과 부와 지혜가 생성된다. 지구상의 인류를 멸망시킬 이러한 세 가지 죄악으로부터 시민적 행복이 생성된다. 이러한 원리가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러한 우수한 법칙들을 통해 전적으로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정이 시민적 질서로 전환되어 인간이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다.”(비코, <신과학> 132~133절)

: 1:03 pm: bluemosesErudition

막스 베버(Max Weber)는 자신의 유명한 논문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윤리적으로 찬양받기 힘든 행위가 어떻게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지칭한 천직(天職)으로 간주되게 되었는가?” 바꾸어 말하면 상업행위와 같은 금전추구 행위가 오랫동안 탐욕과 이익욕으로 경멸되다가 근대에 이르러 어떻게 존경받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기독교 시대가 열릴 무렵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금전과 소유의 욕망을 권력욕 및 색욕과 더불어 타락한 인간의 삼대 죄악으로 비난함으로써 중세 사상의 근본적인 지침을 제공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세 가지 욕구와 열정이 전반적으로 똑같이 나쁜 것으로 비난하였다. 이 중 약간 나은 것이 있다면 권력욕(libido dominandi)이 칭송과 명예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였을 때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로마인의 시민적 미덕이란 조국에 대한 맹목적 사랑과 칭송에 대한 욕구로 부의 추구나 다른 사악한 욕구를 억눌렀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 글의 전개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의 악덕이 다른 악덕을 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였다는 것이다.

열정으로 열정에 대항하게 하는 일련의 사상이 마키아벨리에 의해 시작된 것처럼 앞으로 살펴볼 사상의 흐름의 원천 역시 마키아벨리다. 앞으로 설명되겠지만 이러한 두 가지 흐름은 오랫동안 전혀 개별적으로 진전되었으나 결국에는 결합되어 놀라운 결과를 빚어내었다.(39)

반대되는 두 가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사상의 변화과정에서 나타난 ‘이익’(interest)과 ‘이해관계’(interests)라는 용어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란 결국 일상적인 언어로서나, 계급이익과 이익집단과 같은 사회과학용어에서도 본질적 의미는 경제적 이익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의미가 우세하게 된 것은 용어변화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비교적 나중의 일이다. ‘interest’라는 단어는 16세기 후반에 서부유럽에서 관심, 동경, 이익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결코 개인적 복리의 물질적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단어는 오히려 인간의 전반적 열망을 의미하였으며 특히 이러한 열망을 추구함에 있어 숙고와 계산의 요소를 지칭하였다. 사실상 이 단어의 개념에 관한 진지한 논의는 개인이나 이들의 물질적 복리와는 전혀 관계 없는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앞에서 정치적 수완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인간행위를 보다 현실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의 시작이었음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interest’를 처음으로 정의하고 탐구하게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사상을 확실하게 명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국가의 지배자에게 필요한 행위에 관해 처방을 내렸지만 이를 단순하게 요약하지 않았다. 이후에 그의 저술은 원래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던 이해관계(interest)와 국가의 이성(ragione de stato)이라는 두 용어를 낳게 하여 … 16세기 후반에는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두 가지 새로운 시도를 꾀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마키아벨리 이전 시대의 정치철학의 주류를 이루던 도덕적 교훈과 규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동시에, 군주에게 분명하고 합리적인 지침으로서 “열정이나 일시적 충동에 휩쓸리지 않는 보다 합리적인 의지”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키아벨리 이래로 정치적 저술에서 발전된 이해관계에 관한 생각 - 권력, 영향력, 부를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깊은 이해 - 은 17세기 초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당시의 윤리학자나 저술가들이 인간 본성을 자세히 분석하는데 곧바로 이용되었다. 저술가들이 다루던 대상은 루이 14세의 궁정이었고, 분석의 대상이 되던 사람들은 군주와 동일한 관심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재산 뿐만이 아니라 권력과 영향력에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관계는 자주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어떤 과정을 통해 물질이나 경제적 이익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었고, 이 점이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에서 공통적인 점이다.

인간의 이해관계가 열정과 대비되었다고 할 때, 이해관계가 넓은 의미인가 또는 좁은 의미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해관계만이 분명하다”(Interest will not lie)는 격언은 본래 모든 열망을 차근차근 합리적으로 추구하라는 충고로서 언급되었다. 인간행위가 의도하는 열정이 무엇이든간에 분별과 계산적 효율성을 주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에서 설명한 의미의 변화로 인하여 이해관계와 열정의 대비는 전통적 가치의 관점에서 지극히 놀라운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탐욕이나 이익욕으로 알려진 일단의 열정이 야망, 권력욕 또는 색욕과 같은 다른 열정에 대항하고 이들을 억제하는데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대항하는 열정의 원리와 이해관계의 원리에 대한 이전의 일련의 사상들이 결합하게 된다. 두 가지 원리가 다 마키아벨리에게서 비롯되었지만 마지막 결론 - 탐욕이 야만적 열정을 길들일 뿐 아니라 통치술에 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하게 된 것 - 은 그의 원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17세기에 씌어진 열정에 관한 많은 논문들은 탐욕을 인간의 죄악 중에서 가장 사악한 것으로 보는 중세기 말엽까지의 평가에 전혀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돈벌이가 이해관계로 지칭되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른 열정들과 경쟁하였고 오랫동안 훨씬 덜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던 열정들을 억제하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반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롭고, 비교적 중립적인 용어가 오래된 낙인을 벗기고 중화시켰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해관계라는 용어가, 공사의 영역에 있어 인간사를 처리하는데 보다 이성적인 방법이라는 생각과 긴밀한 연결을 갖게 되면서 나타난 긍정적이고 치유적인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이해관계는 양자의 좋은 점을 다 가지고 있어서 이기적 열정이 이성에 의해 절제되고 격상되었으며 그 열정에 의해 이성이 지향할 바와 힘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혼합적인 인간행위의 유형은 열정의 파괴성이나 이성의 무력함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해관계의 원리는 당시에는 진정한 구원의 메시지로 생각되었던 것이 틀림없다.(49)

: 12:15 pm: bluemosesErudition

“갈릴레이의 이론에 기초하여 인간 본성을 파악하였던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 이전의 처음 열 개의 장을 인간에 관한 논의에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 인간행위와 관련하여 과거의 유토피아적 사상가들에 대한 마키아벨리와 같은 비판을 가장 예리하게 반복했던 사람은 스피노자였다.”(Albert O. Hirsh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