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hope)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영어에 등장한 건 약 1,000년 전으로, 확신과 소망을 결합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희망(hope)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영어에 등장한 건 약 1,000년 전으로, 확신과 소망을 결합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declares the Lord, plans for welfare and not for evil, to give you a future and a hope.”(Jeremiah 29:11 ESV)
01. 욕망 개념의 역사를 관찰할 때 중요한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욕망이 적극적 부정의 대상에서 적극적 긍정의 대상으로, 악의 편에서 선의 편으로 자리를 바꾸는 경위다. 이것이 근대적 욕망 개념이 탄생할 때 일어나는 변화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선(善) 개념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 고대 세계에서 선은 자연의 존재론적 질서에 근거했다. 반면 근대적 욕망 개념의 탄생과 더불어 선의 근거는 주체의 내면에 위치하게 된다. 욕망의 역사에 중요한 두 번째 계기는 욕망이 다형적이고 도착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추이다. 욕망은 생명의 자기보존 논리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의 보편성 저편으로 향한다. 이것은 현대적 욕망 개념이 탄생할 때 일어나는 변화다. 이때 선은 다시 주체의 바깥으로 자리를 옮긴다. 주체의 바깥으로 자리를 옮길 뿐 아니라 균열되기까지 한다. 도덕법칙에 의해 대변되는 선과 그 법칙 너머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선으로 이중화되는 것이다.이런 현대적 욕망 개념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욕망이 존재 일반의 추동 원리로 일반화되거나 역사-문화적 세계 일반의 추동 원리로 승격되는 국면을 지나야 했다.
02. 우리는 데카르트-칸트의 정념론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근대적 욕망 개념이 태어나는지, 그리고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을 중심으로 어떻게 현대적 욕망 개념이 등장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 단계에서 욕망이 존재론적으로 일반화되는 사례로 스피노자-헤겔의 철학을 끌어들일 것이다. 이런 욕망 개념의 역사를 바탕으로 우리가 개입하고자 하는 현대 윤리학의 쟁점은 이것이다. 과연 고대의 덕 윤리와 근대의 의무 윤리학은 통합될 수 있는가? 통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윤리학의 초석에 해당하는 선, 덕, 정의, 도덕법칙 등과 같은 개념들을 다시 설정해야만 할 것이다.
03. 데카르트는 어떠한 유사성도 없는 신체의 물리적 현상(가령 위장의 고통)과 영혼의 심리적 현상(가령 식욕) 사이에서 성립하는 불가해한 상호 맞물림 관계를 ‘생명의 보존(conservation de la vie)’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의 설정(institution de la nature)’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정념의 세계를 자연의 설정에 기초한 기호 작용으로 파악했다. 정념은 영혼으로 하여금 신체의 건강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신호라는 것이며, 생명의 보존에 필요한 일들을 준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동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념은 이론철학에서와는 달리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론철학에서 정념은 애매하고 혼잡한 지각에 불과하다. 온갖 편견과 오류의 원천이며, 그런 만큼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배제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나 실천의 세계에서 추구되는 가치는 진리가 아니라 유용성이며, 다시 말해서 삶에 대해 좋은 것, 선한 것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인간의 불행과 좌절이 많은 경우 정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념은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여 잘못된 결과를 낳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념은 특히 대상을 실재보다 부풀리거나 왜소화하면서 스스로 가중되고 증폭되어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정념이 기본적으로 선한 본성을 지닌다고 본다. 정념이 좋음과 나쁨을 알리는 최초의 기호 작용일 뿐만 아니라 정념에 제대로 반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삶에서의 가장 큰 감미로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정념론』 212항). 데카르트는 이런 확신에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자신의 『정념론』을 전달하면서 “최고선을 얻기 위해 알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정념들입니다”라고 적었다. 정념을 정확히 알고, 이를 바탕으로 정념을 올바로 사용하는 사람만이 신들과 지복을 다툴 수 있게 해줄 최고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04. 칸트는 자유 혹은 자유의지를 가능한 이성의 순수한 자기규정(자율성)에서 찾았고, 이성의 순수한 자기규정은 신체에서 비롯되는 모든 경향들의 세계(현상계) 저편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감성적 경향 일반을 ‘영혼의 병’으로 간주했고, 특히 정념에 대해서는 어떠한 유용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정념은 ‘예외 없이’ 나쁘다는 것이며, 게다가 악마적으로 나쁘므로 ‘도덕적으로 배척되어야’ 한다고 했다. 정념에 대한 이런 칸트의 악담은 정념에서 최고선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는 데카르트의 관점과는 완전히 반대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과도한, 그래서 병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칸트의 악담에는 정념의 긍정적인 힘에 대한 은밀한 인정이 숨어 있다. 그 악담은 정념이 갖는 위력을 오히려 데카르트보다 더 정확히 간파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칸트가 간파한 정념의 위력은 한마디로 실천적 이성을 대신하여 얼마든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할 수 있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05. 칸트에게 욕망은 표상을 현실로 뒤바꾸는 생산적인 힘인데, 이 힘이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자기를 규정할 때 의지(실천적 이성)라 불린다. 반면 욕망의 생산적인 힘이 감성에 의존하여 습관적으로 자기를 규정할 때 경향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 경향(감성적이고 습관적인 욕망)이 “주체의 이성에 의해 거의 또는 전혀 제어할 수 없는” 경우 다시 정념(Leidenschaft)이라 불린다(『인간학』 73절). 즉 정념은 고유한 자기전개의 논리를 지닌 어떤 욕망이되 이성이 수동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감성적이고 습관적인 욕망(경향)이다. 이런 정념은 단지 ‘쾌와 불쾌의 감정’에 해당하는 정서(Affekt)와 구별된다. 칸트가 강조하는 가장 큰 차이는 시간성에 있다. 즉 정서는 우연히 생겼다 잠시 뒤 사라지는 반면, 정념은 오랫동안 지속한다. 칸트는 정서를 뇌졸중이나 도취에 비유한다. 잠정적으로 이성의 반성 능력을 빼앗았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정념은 ‘치료 불가능한 병’이자 ‘치료마저도 거절하는 마법’(『인간학』 80절)이다. “정념은 순수 실천이성에게는 암이며, 대개는 불치의 병이다. 왜냐하면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것을 유일하게 치료해줄 원칙의 지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인간학』 81절).
06. 데카르트와 더불어 정념은 이론의 세계(진위의 세계)와 뚜렷이 구별되는 실천의 세계(선악의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했다. 특히 욕망은 선악의 표상이 탄생하는 원천으로서, 미래의 시간이 현재로 역류하는 구멍으로서, 원격감응을 통해 인간의 정서적 삶을 구조화하는 중심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칸트에게서는 비록 전도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마침내 실천적 행위의 세계 전체를 향도할 자유의 모델을 놓고 이성과 패권을 다투기에 이른다. 고대인에게 선(좋음)의 이념은 자연의 목적론적 질서 속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자연을 연장의 세계로, 순수 물질의 세계로 정의하자마자 모든 것이 달라져야 했다. 자연은 어떠한 질적 성질도, 목적도 부재하는 무의미한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대인에게 선의 이념은 그 무의미한 바깥이 아니라 실천적 주체의 내면에 자리하게 된다. 그것은 주체의 자기규정 능력에 근거하는 파생적 효과에 불과하다. 칸트는 감성적 욕망 저편의 이상적 공간 속에서만 가능한 이성의 순수한 자기규정(자율성)에서 자유를 찾았고, 그 위에 선의 이념이 정초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선을 주체 내부에서 정초하는 근대적 기획 일반의 한 가지 노선에 불과하다. 그 노선과 더불어 실천적 행위에 법칙을 부여하는 능력을 욕망에서 찾는 사상적 흐름도 부단히 형성되었는바 칸트 그 자신도 이런 욕망의 입법적인 능력을 악마적인 것으로나마 은연중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07. 욕망의 존재론에서 욕망은 더 이상 이성에, 하물며 의지에 대립하지 않는다. 이성과 의지는 욕망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거나 욕망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들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욕망은 욕구나 본능 같은 하위의 형태를 띠면서 출현하여 이성이나 의지 같은 상위의 형태를 띠는 방식으로 진화해간다. 이제 욕망은 어두운 면에서 밝은 면에 이르는 인간의 본성 전체를 압축하는 용어다. 욕망의 존재론은 크게 두 유형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연철학의 관점을, 다른 하나는 정신철학의 관점을 위주로 하는 유형이다. 자연철학의 관점을 위주로 할 때 욕망의 탁월한 사례는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에 있다. 정신철학의 관점을 위주로 할 때 욕망은 자연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현상이다. 욕망은 문화에 고유한 상징적 가치와 그 질서를 배경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스피노자가 첫 번째 유형을 대변한다면, 두 번째 유형은 헤겔에 의해 대변된다.
08.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정념론을 자신의 독특한 존재론 안에서 재편하면서 전혀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했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노력, 경향, 추구 등으로 옮길 수 있는 코나투스(conatus)이며, 이것이 그의 욕망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모든 개체는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을 유한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어떤 양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가능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으로 정의한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거나 약화시키려는 경향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존재론적 관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실천적 판단의 세계(선악의 세계)가 ‘생명의 보존’이라는 이념에 의해 중심화된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질서는 코나투스라는 ‘자기보존’의 노력에 의해 구조화된다. 코나투스가 단지 정신에만 관계될 때는 의지(voluntas)라 일컬어지지만, 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관계될 때는 욕구(appetitus)라 불린다. 욕구와 욕망(cupiditas)의 차이는, 욕망이 자신의 욕구를 의식하는 한에서의 인간과 관계된다는 것뿐이다.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욕구로 정의될 수 있다.(『에티카』 3부 정리9 주석)
09. 이행(transitio). 이것이 아마 스피노자 정념론의 독창성을 압축하는 용어일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정념 속에서 보고자 한 것은 잘못된 진위 판단이었다. 정념은 거짓된 믿음에 기초한 오류 판단과 추론의 결과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정념에서 어떤 유용성 혹은 선악에 대한 의식을 보고자 했다. 정념은 애매하고 혼잡한 관념임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오류 판단의 원인일지언정, 생의 보존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알려주는 정확한 신호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념은 선악의 길잡이이자 행복한 삶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반면 스피노자가 정서에서 보고자 한 것은 진위 판단도, 선악 판단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신체의 활동역량이 크거나 작은 쪽으로 변화하는 역동적인 이행에 대한 판단이다.
10. 스피노자는 존재의 원초적 사태를 ‘자신의 존재 속에 존속하려는 개체의 노력’으로 보고, 욕망을 이런 코나투스의 인간학적 발로로 정의한다. 마찬가지로 헤겔은, 특히 『정신현상학』의 헤겔은 욕망을 존재의 근원적 리듬인 반성적 차이, 혹은 자기복귀적인 부정이 인간의 내면에서 육화된 것으로 정의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스피노자의 욕망은 파괴, 부정, 고통, 죽음을 무조건 회피하고 외면한다. 결여를 모른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욕망이다. 반면 헤겔의 욕망은 부정과 파괴, 고통과 슬픔, 나아가서 죽음마저 삶의 필연적 계기로 수용한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되 그 긍정의 조건은 자기의 부정과 파괴에 있다. 헤겔에게 욕망은 그런 자발적 자기부정을 통해 파괴되는가 하면 다시 일어선다. 죽는가 하면 되살아나고, 그런 반복을 통해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간다. 이런 점이 아니라 해도 스피노자와 헤겔의 욕망 개념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지평 위에 서 있다. 즉 스피노자는 욕망을 기본적으로 자연적 현상으로 보는 반면, 헤겔은 욕망을 문화적 현상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스피노자에게서 욕망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자기보존 충동에서 온다. 인간들 사이의 상호주관적 질서는 도덕적으로 원숙한 관대한 주체에게서나 적극적으로 긍정된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욕망은 처음부터 상호주관적 질서 속에서 탄생한다.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만 촉발될 수 있고 타인에 의해서만 만족될 수 있다. 그것이 헤겔이 말하는 ‘인정’의 욕망이자 거기서 비롯되는 인정투쟁이다. 그리고 이 인정투쟁은 자기보존의 욕망이나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자의 승리로 돌아간다.
11. 욕망에 대한 헤겔의 테제는 두 가지로 집약해볼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고유한 욕망은 인정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미를 생산하고 교환하는 노동의 주체는 죽음의 공포에 의해 예속된 노예적 주체, 소외된 주체라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테제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 라캉은 정신분석을 욕망 개념을 중심으로 재편했다는 점에서 이미 욕망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라캉이 스피노자와 헤겔의 욕망 개념을 창조적으로 전유하는 가운데 무의식 이론을 욕망 이론으로 재편했다는 사실이다. 라캉은 인간의 본질은 욕망에 있다는 스피노자의 테제를 끝까지 고수했고, 코제브의 강력한 영향 아래 욕망에 대한 헤겔의 두 가지 테제를 발전시켰다.
12. 헤겔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무의식 이론에서 그대로 수용되어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명제로 압축된다. 즉 욕망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하고 마침내 스스로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열망한다. 라캉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 정확히 헤겔적인 공식임을 표명한다. “내가 무의식은 대문자 A로 표기되는 대타자(Autre)의 담론이라고 말했다면, 이는 욕망의 인정과 인정의 욕망이 서로 얽혀가는 저편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헤겔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서도 욕망은 인정의 욕망이고, 주체는 어떤 희생과 소외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노예적 주체다.
13. 헤겔에게 주체가 노동의 세계로 소외된 노예적 주체라면, 라캉에게 주체는 언어의 세계로 소외된 말하는 주체다. 주체는 언어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의미의 차원(생각과 소통의 차원)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의 존재(parlêtre)’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주체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팔루스)다. 말하는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 주체, ‘존재결핍(manque-à-être)’을 겪는 주체다. 주체는 말의 세계로 소외되는 덕분에 의미 전달의 능력이나 합리적 사고의 능력을 얻지만, 그 대신 자신의 존재를 희생해야만 한다. ‘말의 존재’와 ‘존재결핍’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사태의 두 측면이다. 그러므로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선언하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고쳐 써야 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라캉이 이 새로운 코기토 공식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이 사유와 존재의 구조적 불일치에서 성립한다는 점이다. 즉 욕망이란 인간이 상호주관성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서 필연적으로 포기해야 존재결핍에서 오는 ‘존재의 정념(une passion de l’être)’이다. 라캉은 “그것이 있었던 곳으로 나는 돌아가야 한다(Wo es war, soll ich werden)”라는 프로이트의 공식을 이런 관점에서 정신분석의 윤리를 향도할 도덕적 명법으로 끌어올린다. 즉 인간은 합리적 의미의 질서로 진입하면서 ‘정상적인’ 주체가 되지만, 그 대가로 주체는 존재와 사유의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욕망은 그 분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존재의 정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그런 정념 속에서 들리는 당위의 목소리(soll)가 주체의 실천적 행동을 규정하는 최후의 도덕적 명법이 되어야 한다.
14. 욕망은 프로이트와 라캉에 의해 대변되는 정신분석에 이르러 헤겔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을 띠게 된다. 일단 자기의식의 차원에 있던 욕망이 무의식의 차원으로 내려간다는 것이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차이다. 정신분석에서 욕망은 더 이상 자기의식 일반이 아니라 무의식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다음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무의식적 욕망의 다형성과 도착성이다. 무의식적 욕망은―자연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고정된 대상이나 목표가 없으며, 따라서 ‘정상적인’ 진로가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적 욕망의 주체 앞에서 헤겔의 목적론적 질서는 사라져버린다. 이것은 무의식적 욕망이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과 같다. 헤겔의 욕망은 무수한 우여곡절 속에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다. 욕망하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어떤 소외를 겪어야 하지만, 그 소외는 마침내 극복된다. 그러나 무의식적 욕망에게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무의식적 욕망은 결코 자신의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 무의식적 욕망은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욕망이다. 무의식적 욕망에게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오인(誤認)이나 환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무의식적 욕망은 합리적 충족이 가능한, 따라서 ‘정상’으로 간주되는 어떤 고정된 형태를 끊임없이 벗어나려 한다. 변태가 정신분석이 발견한 욕망의 기본적 속성이며, 이것이 현대적 욕망 개념의 근간이다.
15. 정신분석을 언어분석과 동일시하는 라캉은 한 걸음 더 멀리 나아간다. 프로이트가 충동의 기원으로 가정하던 생물학적 차원 자체가 부정되고, 그 자리에 문화를 구성하는 상징체계가 들어선다. 신체가 무정부 상태의 부분충동들의 담지자라면, 그 충동들은 이제 신체가 특정한 정체성을 얻기 위해 기표의 질서에 편입될 때 발생한다. 즉 충동은 이제 상징적 기입의 잔여에 해당한다.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서 분절된 신체와 그것을 채우는 충동들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상징적 기록의 효과이고,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16. 나르시시즘의 발견과 더불어 프로이트는 성충동 못지않게 자아충동이 쾌락원칙을 따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반복강박(고통스러운 꿈이나 기억이 되풀이되는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마침내 충동의 대극 구조를 죽음충동과 생명충동으로 바꾸었다. 이때 생명충동은 모두 쾌락원칙을 따르는 반면, 죽음충동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이때 쾌락원칙을 넘어선다는 것은 그 원칙과 무관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쾌락원칙에 모순되는 일 없이 이 원칙에 독립적이며, 쾌를 얻고 불쾌를 피한다는 목적보다 좀 더 근원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능”을 암시한다. 좀 더 근원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쾌락원칙의 지배가 성립하기 전에 그것을 예비”하고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어떤 정초 관계에 있음을 함축한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의 기능을 “무기체 세계의 정지 상태로 다시 돌아가려는 모든 생명체의 가장 일반적인 노력”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 새로운 발견에 따르면, 욕망은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이되 쾌락원칙 너머에서 처음 시작된다. 욕망이 성립하는 원초적 국면은 쾌와 불쾌의 대립이 성립하기 이전이다. 쾌와 불쾌의 대립이 사라진다는 것은 선과 악의 대립이 사라진다는 것과 같다. 데카르트의 정념론에서 모든 정념의 뿌리로 간주되는 경이는 선악 판단이 개입하기 이전에 발생하는 정념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프로이트에게서도 욕망의 원천에 있는 죽음충동은 선악의 차이를, 나아가 쾌-불쾌의 구별을 모른다. 욕망은 쾌-불쾌의 구별을 모르는 충동에서 발아하여 다시 그런 무관심한 충동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욕망은 쾌락원칙에 따르되 쾌락원칙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따른다. 죽음충동은 무의식적 욕망의 뿌리인 동시에 ― 도달할 수 없는 ― 목적지이기도 하다.
17. 죽음충동의 가설을 거부했던 대부분의 프로이트 계승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라캉은 이 가설을 정신분석의 핵심으로 간주했고, 마침내 “모든 충동은 잠재적으로 죽음충동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모든 충동이 잠재적으로 죽음충동이라는 것은 그것이 본성상 쾌락원칙을 위반하려는 도착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쾌락원칙이란 무엇인가. 라캉에게 쾌락원칙의 기능은 일단 “심리적 장치의 모든 작동 방식을 규제하는 긴장의 수준을 가장 낮은 수준에서 유지”하는 데 있다. 이것은 불쾌를 (묶이지 않은) 자극량의 증가로, 쾌를 과도한 자극량의 감소로 정의하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반영하는 설명이다. 쾌는 심리적 장치의 평형 상태, 항상성, 안정성에서 온다는 것이며, 쾌락원칙은 “유기체에게 긴장의 수준을 참을 수 있고 평형을 조절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규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유기체나 심리적 장치는 쾌락원칙이 통제하는 “쾌-불쾌의 대극 구조의 경계를 초과하지 않는 한에서”만 자극량의 증가를 견뎌낼 수 있다. 그러므로 쾌락원칙은 쾌락의 폭발적 쇄도를 가져오는 원리가 아니다. 쾌락원칙은 무조건 흥분을 추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어하고 규제하는 역할, 자극량을 고정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이것은 가능한 쾌락을 즐기도록 부추긴다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다. 오히려 쾌락을 가능한 즐기지 않도록 강제하는 법이 쾌락원칙이다. 이 점에서 쾌락원칙은 모세의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칙의 대리자라 할 수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쾌락원칙과 도덕법칙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금지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구별될 필요가 없다. 의미의 질서가 기표 교환의 질서에 기초하는 한에서, “쾌락원칙은 결코 기표의 지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8. 칸트는 경험적 현상의 세계(현상계) 저편을 ‘물 자체’로 불렀다. 이런 존재론적 구도는 라캉에게 그대로 전유되어 칸트의 현상계는 상징계로, 물 자체는 실재(le réel)로 새롭게 명명된다. 라캉이 대상관계 이론을 중시했음을 환기하자. 대상관계 이론에서 욕망의 원인은 리비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관계에 있다. ‘사물’(das Ding)은 상징계 저편, 다시 말해서 쾌락원칙과 그것이 대변하는 도덕법칙 너머로 향하는 무의식적 욕망(죽음충동)의 대상을 개념화할 필요성에서 온 용어다. 이런 필요성에 상응하는 라캉의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욕망의 대상원인은 최종적으로 ‘환상대상 a(objet a)’로 명명된다. 그런데 대상관계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와 대상의 거리다. 욕망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되 관계가 너무 멀거나 가까우면 욕망이 소멸하거나 과잉에 이른다. 라캉은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에서 쾌락원칙의 기능이 주체와 사물 사이의 거리를 규제하는 데 있다고 정의한다. 즉 주체와 사물의 거리가 적절히 유지될 때 심리적 장치의 자극이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라캉에게 쾌락원칙이 ‘기표의 지배’를 의미한다면, 사물은 정확히 이 기표의 지배가 남긴 어떤 잔여다. “이 내밀한 외부성, 이 외밀성(extimité), 이것이 사물이다.”
19. 쾌락원칙이 가능한 쾌락을 즐기지 못하게 통제하는 방어의 원리라면, 죽음충동은 아무런 제한 없이 쾌락을 즐기도록 부추긴다. 그 결과는 쾌락원칙이 조절하는 평형 상태의 파괴다. 라캉은 죽음충동에 이끌려 주체와 사물과의 거리가 좁혀질 때 발생하는 새로운 자극량을 주이상스(jouissance)라 부른다. 우리말로는 ‘향락’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향락 속에서 주체는 대상(사물)과 아무런 거리 없이 하나가 된다. 그러나 대상 속에서 주체가 사라지는 이런 황홀경은 결코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상징계 내의 환상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상상적인 사건이다. 라캉의 관점에서 프로이트의 주요 개념들은 향락(주이상스)의 개념을 중심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가령 거세는 향락의 거부로 정식화되어야 한다. “거세가 의미하는 것은 향락이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향락이 도달될 수 있는 것은 욕망의 법이 만드는 사다리가 전도되었을 때임을 말한다.”(E 827) “향락은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금지되어 있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행간 속에서만 말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법은 이런 금지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E 821)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체가 로고스의 질서로 진입하기 위해 희생한 것, 쾌락원칙이 제한하는 것, 도덕법칙이 금지하는 것은 모두 ‘사물’과 하나가 되려는 향락이다.
20. 칸트는 도덕법칙을 윤리학의 중심에 놓은 철학자이다. 고대 윤리학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善)을 정의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이런 윤리학에서 도덕법칙은 선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에 불과하다. 반면 칸트의 윤리학에서는 보편적인 도덕법칙의 명령(의무)에 따르는 것이 일차적이고, 선과 악은 그 의무의 이행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2차적 귀결이다. 여기서는 욕망을 비롯한 모든 정념, 자비를 포함한 모든 정서, 그밖에 신체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경향은 모두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하물며 향락과 같은 변태적 욕망은 말할 것도 없다. 칸트의 관점에서 그것은 법과는 완전히 다른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라캉은 사도 바울에 의지하여 이런 칸트가 전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차원을 가리킨다. 그것은 도덕법칙이 언제나 향락과 상보적으로 함께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행 관계 때문에 도덕법칙의 구속력이 강해질수록 그것과 비례하여 향락의 강도도 커진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욕망과 법의 변증법적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의 욕망은 오로지 법과 맺는 관계 속에서만 불타오르고, 이를 통해 죽음의 욕망이 되어버린다.”(S7 101) 그러므로 칸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법은 욕망에 대해 단지 금지하는 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욕망을 낳고 활성화시키고 악마적으로 변질시키기까지 하는 것이 법인 것이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초자아(superego)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초자아는 내면화된 사회적 규범과 이상이다. 도덕법칙의 기원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런 규범적 이상과 법을 욕망에 외면적으로 대립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법을 단지 욕망을 금지하거나 억압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뿐 법과 욕망의 내재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1. 라캉은 사드를 ‘칸트의 진리’로 내세운다. 라캉은 사드가 칸트의 진리인 것처럼, 칸트 또한 사드의 진리라고 말한다. 사드가 칸트가 가리고 있는 일면을 보게 해주는 것처럼, 칸트 또한 사드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어떤 한계인가? 그것은 실재(순수 자연)를 가리고 있는 상징의 세계가 파괴 가능하다는 순진한 믿음에 있다. 사드적 주체는 상징계 안에서 일어나는 죽음(제1의 죽음)이 아니라 그 바깥의 실재 차원의 죽음(제2의 죽음)을 원한다. 기표 질서 내의 파괴가 아니라 기표 질서 너머의 파괴를 추구하고, 이를 위해 상징계를 무차별하게 박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한 계획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 칸트다. 칸트는 상징계가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진실을 대변하는 철학자다. 기표는, 이름은, 그리고 상징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기표를 모두 부수고 그 너머로 간다는 것은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드적 주체가 의지를 집중하여 추구하는 죽음, 상징계 바깥의 본체계에서의 죽음, 순수 자연 상태의 죽음이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22. 라캉의 윤리학은 욕망의 윤리학이되 칸트의 윤리학과 한편에 서는 윤리학이다. 그러나 라캉이 의도하는 윤리학이 있다면, 그것은 법에 무조건 복종하되 그 법의 한계를 발견할 만큼 복종하라는 윤리학일 것이다. 그것은 칸트보다 더 칸트적인 윤리학, 그래서 도덕법칙이 거듭 자신에 고유한 한계를 확인하는 가운데 탈구축의 논리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윤리학일 것이다. 이런 윤리학이 그리는 주체는 욕망의 주체이되 그 욕망은 쾌락원칙 너머로 나아가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향락의 주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윤리적 주체는 향락의 주체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향락의 주체가 그대로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향락의 주체는 얼마든지 비윤리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향락의 주체는 어떻게 윤리적 주체로 이행할 수 있는가? 향락의 주체가 쾌락원칙의 금지를 무시하고 ‘사물’로 나아가려는 도착적 주체라면, 도착적 주체는 어떻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이런 윤리적 이행의 문제에 대해 라캉은 ‘승화(sublimation)’라는 말로 답한다. 라캉에게서 승화는 대상이 ‘사물(das Ding)’의 자리로 옮겨갈 때, “사물의 존엄한 위치로 상승할 때”(S7 133)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먼저 그것은 숭고한 성질(sublime quality)이 대상 내재적 속성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숭고성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위치일 뿐이다. 대상의 자리가 ‘사물’의 자리와 겹치게 되는 것이 숭고다.
23. 도착과 승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물’의 자리에 놓이는 것이 주체일 때와 대상일 때의 차이다. 즉 대상이 사물의 숭고한 위치로 자리를 옮기면 승화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주체가 숭고한 자리를 차지하면 도착이 되는 것이다.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숭고한 위치에 오르면 욕망은 도착적일 뿐이 아니라 범죄적이 되어버린다. 향락과 숭고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향락 속에서 주체는 ‘사물’ 속으로 함몰해버린다. 주체와 사물 사이에 거리가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반면 승화에서는 주체와 숭고한 사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라캉은 승화의 탁월한 사례로 중세의 궁정식 사랑을 들었다. 연인을 숭고한 사물의 자리에 놓되 엄격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궁정식 사랑이라는 것이다. 향락의 주체는 궁정식 사랑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함몰해가는 숭고한 대상에 일정한 거리를 둘 때 윤리적 이행을 기대할 수 있다. 도착적 욕망의 주체는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숭고한 ‘사물’의 자리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대상을 옮겨놓을 때 윤리적 주체로 이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