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30th, 2016

November 30, 2016: 10:52 pm: bluemosesErudition

“일반적으로 ‘modernus’라는 말은 서양의 문헌에서 14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이 말이 처음 쓰였을 때는 특정한 집단이나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적인 의미, 즉 ‘동시대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자신과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moderni’로, 과거의 사람들은 ‘antiqui’로 지칭되었으며 몇 십 년이 지나면 moderni들이 자연스럽게 antiqui가 되었으므로 이 말은 세대를 구분하는 뜻 외에는 어떤 뜻도 가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말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미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Adam Wodehan은 1300년 경에 학문 활동을 한 Scotus를 ‘antiqui’라 부르고, 1310년 경 부터 학문 활동을 한 Ockham과 Campsale을 ‘moderni’라 지칭했다. 거의 동일한 시대에 학문 활동을 한 사람들을 서로 구분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해석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생긴 Oxford의 입장(terminist logic)과 Paris의 입장(modistic logic)의 대립에 근거하는데, 이 대립에서 옥스퍼드의 입장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modern age’에 속한다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Oxford 측의 핵심적인 주장은 언어구조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진술과 명제의 의미는 사유와 언어 자체의 문맥뿐만 아니라 언어적, 정신외적 맥락에 달려 있다는 것인 반면, Paris의 입장은 언어구조가 사물의 본질의 일부이지 인간의 신념이나 언어외적 맥락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10:46 pm: bluemosesErudition

“나는, 언제나 오늘이 나의 花樣年華이다.”(강유원)

: 10:23 pm: bluemosesErudition

“신정에 설득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온갖 비판의식의 부담에서 해방된다. 그들은 매사에 그저 감사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면서 신을 따를 뿐이다. 그러니 혹시 이 신정의 핵심, 특히 핵심과 외부의 경계선상에 있는 사람의 처지는 어떻겠는가?” _ 라종일, <장성택의 길 - 신정의 불온한 경계인>, 알마, 2016.

: 9:49 pm: bluemosesErudition

“총통의 절대적 무책임성에서 절대적 대체불가능성으로 가는 것은 결코 먼 길이 아니다.”(Sebastian Haffner, Anmerkungen zu Hitler)

: 12:21 pm: bluemosesErudition

“일본은 1980년대 후반부터 경기 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수출이 타격을 입었고, 내수 시장은 1990년대 초 부동산과 주식 버블 붕괴로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본격적으로 장기 저성장에 돌입한 시기는 인구 절벽이 시작된 1995년부터다. 인구 절벽이란 15세부터 64세까지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늘어나던 일본의 생산 가능 인구는 1995년을 기점으로 줄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 경제는 본격적인 장기 저성장 시대를 맞았다. (중략) 생산 가능 인구 감소로 시작된 소비 절벽은 일본 경제를 악순환에 빠뜨렸다. 가계의 소비 감소로 매출에 타격을 입은 기업은 투자를 줄이는 동시에 인력 구조조정과 임금 삭감까지 단행했다. 그러자 일본 가계는 소비를 더욱 줄였다. 가계에서 시작된 불황이 기업 불황을 유발하고, 기업의 불황이 다시 가계 불황을 유발하는 ‘복합 불황’에 빠진 것이다. … 한때 세계 최고의 재정 건전 국가였던 일본의 국가 재정은 20년 만에 선진국 가운데 최악 수준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는 2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버블 붕괴로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악화했고, 올해는 인구 절벽을 맞았다. 한국의 생산 가능 인구는 내년부터 줄기 시작한다. 만약 한국 정부가 특단의 조처를 하지 않으면 일본과 같은 소비 절벽을 맞는 것도 시간문제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일본보다 더 나쁘다. 경제 규모도 1990년대 일본보다 못하고 국민소득이 일본보다 적다. 국가 재정 상황도, 기업 경쟁력도 일본보다 못하다. 그런데 고령화 속도는 인구 절벽을 겪던 당시의 일본보다 더 빠르다. 노인층의 빈곤율은 50% 가까운 수준이며, 사회 양극화도 일본보다 심하다. 게다가 장기 저성장의 직격탄을 맞게 될 가게가 골목 곳곳에 있다. 자영업 종사자가 600만명 이상이며, 이들이 전체 사업체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6%에 달한다. 앞으로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 자영업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 11:53 am: bluemosesErudition

하박국, 비트겐슈타인, 나가이 다카시

: 2:49 am: bluemosesErudition

“하나님이 리더의 삶을 기뻐하시면 그분의 거룩한 임재가 확연히 나타난다. 19세기 전도자 찰스 피니의 삶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분명히 나타났다. 1826년 뉴욕 공단에 간 피니는 친척이 감독으로 있던 면 제조 공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많은 여공들이 베틀과 방적기에서 일하고 있는 커다란 방을 지날 때였다. 여자들 몇몇이 피니를 보며 뭐라고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피니가 다가가자 그들은 더 심하게 동요했다. 피니가 3m 앞으로 다가가자 한 여자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곧 다른 사람들도 흐느끼기 시작했는데 자신들의 죄가 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는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퍼져 온 공장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느꼈다. 불신자인 사장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깨닫고 잠시 공장 문을 닫았다. 그는 피니에게 설교를 부탁했다. 영혼의 평안을 찾는 법을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그저 공장 안으로 들어갔을 뿐인데도 피니의 삶 속에 거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해서 주변을 압도하며 사람들을 뒤흔든 것이다.”(125~126)

_ 헨리 블랙커비, <영적 리더십>, 두란노, 2002.

: 2:15 am: bluemosesErudition

“오순절 신학을 연구하려고 … 도널드 데이튼 교수가 있던 드류 대학교로 진학을 결심했습니다. 드류 대학교에서 데이튼 교수의 첫 수업은 ‘미국 복음주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수업에서 찰스 피니를 만났습니다. 찰스 피니는 회심과 노예제도 반대를 한 묶음으로 보았습니다. 찰스 피니의 영향 아래 있던 복음주의자들은 이후에 여성운동이나 도시빈민 구제사역을 주도했습니다. 저는 저의 성결교 신앙의 배경이 이런 전통에 잇대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짐 월리스의 책을 통해서 ‘복음주의’에 남아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영성의 개념이 모호하긴 합니다. … 제 나름대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봤습니다. 인간 안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졌던 이성, 감성, 의지, 이런 것들이 있듯이 종교를 가능하게 하는 ‘패컬티’(faculty)가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인간을 종교적 존재,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라고 규정하잖아요. 그럼 그게 뭘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성’(religious affections)이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에드워즈가 1차 대각성 운동을 경험하고 나서 이런 영적 체험들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 ‘종교적 감성’이라 명명합니다. 이성이나 감정으로 환원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는데, 에드워즈는 그것을 ‘종교적 감성’이라 부릅니다. 필링(feeling)이나 이모션(emotion)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어펙션(affec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용어를 백 년이 지나서 슐라이어마허가 ‘절대의존감정’이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그는 칸트식의 이성을 통한 인식이 아니라,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안에 있는 생득적 요소를 제안합니다. 거의 비슷하게 퀘이커교도인 조지 폭스가 ‘내적인 빛’(inner light)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성으로 환원되지도 않고 감정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의 신적 접촉이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고유한 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다 똑같습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궁극적 관심도 다 하나라고 보고, 떠나는 이유도 하나라고 봐요. ‘가나안 성도’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 사람들이 종교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를 보는 겁니다. 진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여주지 못하니까 나간 것이죠. 교회 안에 있는 청년들 중에도 교회를 떠나고 싶은 갈등을 가진 사람이 아마도 나간 사람만큼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들 모두 하나님을 경험하고, 세상과 차원이 다른 공동체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기업, 정부, 학교 등 그들이 속해 있는 모든 곳에서 생존을 염려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데, 교회마저 맘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실망한 겁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된 거죠. 저는 가나안 성도 현상은 오래 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둘 중 하나인데, 신앙을 버리고 세속화하거나 다시 교회로 돌아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시 기존의 교회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을 영접할 교회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초대교회 유무상통의 공동체, 더불어 살아가는 교회, 부자가 약자를 끌어안고 같이 가는 교회, 강자가 약자와 함께 거할 수 있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내는 교회입니다. 앞으로는 복음의 본질을 구현해낼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이 있는 교회들이 작지만 놀라운 일을 해내는 시대가 올 거라고 봅니다.”

_ 매일성경 순 인터뷰, 배덕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