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츠비의 위대함은 1920년대의 무모함이다.
과도한 죄의식은 언제나 이미 거짓된 죄책감이고, 그것은 우리를 자포자기의 수렁으로 낚아챈다. 욕망에 흔들리는가. 유혹이 범람하는 시대다. 관건은, 굳게 서서 넘어지지 않겠다는 각오가 아니다. 날마다 ‘저는 주의 종이라’ 엎드려 고백함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래야, 끝까지 견디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Older men are to be sober-minded, dignified, self-controlled, sound in faith, in love, and in steadfastness. Likewise, urge the younger men to be self-controlled. Show yourself in all respects to be a model of good works, and in your teaching show integrity, dignity, and sound speech that cannot be condemned, so that an opponent may be put to shame, having nothing evil to say about us.(Titus 2:2, 6-8 ESV)
역사든 현실이든 음모론이나 궁중비화식 서술은 해악이 있다. 극소수 엘리트 영역을 위주로, 사회적 맥락보다는 개인 심리와 윤리 차원으로 상황을 단순화함으로써 대다수 인민의 구체적인 삶과 상황의 총체성을 소거하기 때문이다. …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이 사태는 박근혜나 최순실 따위 지극히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행태가 될수록 안전하다. 이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이 입에 올리는 ‘국정농단’이라는 말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국정을 농단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가정하여 그 결과가 정반대의 가치로, 친노동자·서민적 정책으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정체가 드러난 최순실은 ‘의적’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국정 운영의 합리성보다 중요한 건 사회에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어떤 계급의 이해에 기여하는가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지배계급은 온 나라가 한목소리로 ‘국정농단’을 외치도록 함으로써, 자신들도 똑같은 피해자가 되어 상황을 빠져나간다.
분노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고, 퇴진 여부와 관련 없이 박근혜가 기존의 권력을 회복하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사회에 어떤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올까. 박근혜의 무력화는 지배계급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지배계급이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변혁적 사회 변화는 사회적 분노가 다른 세상의 전망과 결합할 때 만들어진다. 분노는 내 밖의 것들에 대한 반응이지만, 전망은 내 안에서 진행하는 엄격한 지적 활동이다. 분노와 전망의 결합이야말로 공화국 시민의 요건이자 표징이다.
이번 사태로 분노는 혁명 전야 수준까지 올랐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쇠락을 비롯해 이미 미약해질 대로 미약해진 다른 세상의 전망이 그에 걸맞게 저절로 생겨난 건 아니다. 전망이 ‘박근혜 없는 세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배계급은 이 소란 속에서도 ‘선수 교체’만으로 모든 걸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지배계급의 2중대인 민주당도 당장은 욕을 먹고 있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정권 교체’의 깃발 아래 다들 돌아올 거라 확신한다.
기존 언론에서 볼 수 없었던 손석희 뉴스의 중도 우파적 양식과 매력이 보다 급진적 관점의 존재 의미를 잊게 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세련되고 교양 있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 지상파 뉴스가 심각하게 반동화한 상태에서 손석희 뉴스의 미덕과 유익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지나치게 전면화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관점과 통찰을 잃는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의 분노에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_ 김규항,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6/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