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5th, 2017

January 5, 2017: 11:46 pm: bluemosesErudition

“진짜 창의적인 인재는 학교 성적보다 자신만의 관심사, 자신만의 연구에 깊이 몰두하는 경향을 보인다.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적어도 12명은 학교 성적이 평이한 수준이었고 IQ도 일반 대학 졸업자와 비슷하다.” “공통 교과과정과 표준화된 시험이 창의성을 죽인다. 창의(creativity)란 말 자체가 ‘세상에 없는 새 지식’이라는 뜻이다. 기존 지식만을 주입하는 교육은 구체제 권위에 순응하는 소극적 인재를 양산한다. 그러면 시간이 갈수록 창의적 인재가 나타나기 어려워진다.”

창의적 인재는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해보려는 사람이다. … 타고난 호기심 위에 지식과 탐구력을 갖춰 스스로 깨닫고 그 위에 새 지식을 또 쌓는 경지에 도달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전공 분야뿐 아니라 취미 활동도 활발했다는 점이다. 노벨상 수상자들을 분석해본 결과 대다수는 학문 외에도 미술, 문학, 역사 등을 폭넓게 탐독하고 악기 연주와 스포츠 등을 즐겼다. 또 자신의 분야 외 다른 직업을 경험하기도 했다. 즉 학교 밖에서의 취미와 경험 등이 창의성 발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 4:06 pm: bluemosesErudition

効能・効果 _ 肩こり、腰痛、筋肉痛、筋肉疲労、打撲、ねんざ、関節痛、骨折痛、しもやけ

: 2:30 pm: bluemosesErudition

“A little learning is a dangerous thing; Drink deep, or taste not the Pierian spring.”(Alexander Pope)

: 10:57 am: bluemosesErudition

대표적인 `5월 작가`. 1980년 5·18 당시 전남대 영문과 4학년으로 `광대`라는 문화운동 단체 회원이던 임철우는 광주항쟁 기간 동안 가까운 선후배와 벗들이 혹은 죽고 혹은 다치고 하는 가운데 `짱돌 몇 개밖에 던지지 못 했던` 멍에를 문학으로 승화하여 풀어 왔다.

임철우 문학의 동력은 특별난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향, 남다른 청소년기, 그리고 광주의 경험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남해안 낙도에서 태어난 임철우는 면에서 단 세 명뿐인 대학 교육 이수자 중의 한 사람을 아버지로, 다른 한 사람을 당숙으로 두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버지와 당숙은 해방을 전후하여 좌익에 합류한 후, 학교를 작파하고 고향에 내려와 좌익 청년단을 조직했다.

부친은 도중에 발을 뺐으나 당숙은 청년단장을 맡아 활동하다 6·25 때 인민군에 합류하여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다. 토벌대에 붙잡힌 당숙은 1982년에야 출감했고, 형은 부친의 과거 때문에 승진에서 탈락한다.

뚜렷한 전선도 없이 점령군이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혹은 그 반대로 수시로 바뀌면서 그 때마다 무수한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고향 마을의 역사는 임철우의 문학에도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특히 후퇴하던 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하고 나타나서는 무작정 환영 나올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을 쏘아 죽인 `나주부대 사건`은, 후에 영화화까지 된 임철우의 『그 섬에 가고 싶다』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임철우 일가는 광주로 이사했지만, 전기도 없는 마을에서 올라온 `촌놈`은 도시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세 살 때부터 사업상 떨어져 살았던 부모님의 무관심까지 겹쳐, 임철우는 초등학교 3학년 이래 수없이 반복되는 가출을 감행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장롱 자물쇠를 망치로 부수고 돈을 훔쳐 가출하는가 하면, 중학교 때는 퇴학을 당했다가 교감 선생님이 아버지 친구였던 덕분에 복학되기도 했다. 급기야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임철우는 거기서 대오각성, `내 삶은 내 몫일 수밖에 없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갑자기 `철이 들어` 무섭게 공부에 매달렸으나, 한밤중에 모범생이던 형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으면, `형 공부 방해되게 안 자고 뭐하냐`는 소리나 들었다고 한다.

`못된 자식`에 대한 냉대는 대입 시험 날까지 계속돼, 점심 시간에 홀로 옥상에 올라가 다른 수험생들이 가족들과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울고 있다가, 뒤늦게 그 대학에 다니던 형이 사온 빵과 콜라를 우겨넣고 트림을 해가면서 시험을 치렀다.

1980년 5·18이 터졌을 때 그는 전남대 영문과 4학년에 다니다 한 달 전에 휴학한 상태였다. 5월 18일 아침까지만 해도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를 각색하여 연습 중이던 `광대` 단원들은 계엄령이 내린 후 피신하게 되었다.

친척집으로 피신했던 임철우는 곧 거리로 나와 당시의 `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의 참가 인원, 시각, 사망자수, 심지어 그 시각 텔레비전을 통해 한가하게 중계되던 야구 경기의 스코어까지.

그러나 임철우는 사람들이 총을 들 때 `이 총으로 죽여야 할 적이 누군가?`라는 번민 끝에 총을 들지 않았으며, 계엄군이 도청으로 진주해 들어올 때는 친척집 다락방에 숨음으로써 `살아남은 자`가 되었다.

등단 이후 임철우는 줄기차게 광주의 5월을 담은 작품들을 내놨으며, 끝내는 5월 광주에 대한 다섯 권짜리 기록문학 『봄날』을 써냄으로써 광주에 대한 마음의 빚을 얼만큼이나마 씻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