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安石(1021~1086)은 38세 되던 해인 仁宗 嘉祐 3년(1058) 10월 江南東路 提點刑獄으로부터 중앙으로 불리워져 三司度支判官에 임명된다. 당시 정치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朝野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兩浙路 明州 知鄞縣으로서 수년간 근무하면서 올렸던 탁월한 治積이라든가, 혹은 거듭된 중앙의 발탁에도 불구하고 모두 固辭하고 지방관으로 전전했던 점 등이 世間의 士大夫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특히 후자, 즉 관직에의 無慾은, 상위관직으로의 진출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이 빚어지던 당시의 관계 분위기에서 커다란 美德으로 云謂되고 있었다. 이렇듯 중앙 요직으로의 발탁을 고사하고 있던 王安石이 모처럼 중앙관을 수락하고 조정에 나아가면서 올리는 復命書가 바로 여기서 소개하는 「上仁宗皇帝言事書」이다.”(이근명)
“지금은 모두가 … 정기가 소진되고 정신이 피폐되어도 온종일 과거 공부만 시킵니다. 그러다 등용되면 지금까지 한 공부를 죄다 버리게 하고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일을 맡깁니다. 해야 할 일을 완수할 줄 아는 인재가 적어진 까닭입니다. 그래서 제가 [과거는] ‘사람의 능력을 계발해주기는커녕 사람을 몹시 괴롭히고 파괴하여 무능력자가 되게 한다’고 아뢨던 것입니다.”(王安石)
“그의 눈길은 자연스레 과거제도로 쏠렸다. 대다수가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르는 현실에서 과거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학교가 ‘과거 수험용 학원’으로 전락함은 그다지 이상할 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과거에서 평가하는 역량이 ‘된 사람’, ‘든 사람’ 여부를 판정하는 것과 멀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과거에선 주로 시 짓기와 경전 암기를 시험하고 있었다. 왕안석이 보기에 이것으로는 국가 대소사라는 공적 직분을 수행하는 데 요청되는 실무적, 도덕적 역량을 잴 수 없었다. 하여 수험자의 경세 역량을 측정하는 방향으로 과거를 개혁했다. 도덕적, 실무적 주제에 대한 논변인 논(論)과 책(策)의 작성을 과거의 핵심으로 삼았다. 다만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는 관리가 되는 길을 다변화했다. 학교에서 교육만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소정의 평가체제를 통과한 이는 과거 급제에 준하여 임용케 했다. 교육 연구 기능만 수행했던 학교에 관리 임용 기능을 더한 것이다. … 그가 제시한 개혁의 핵심은 양사와 취사 모두 경세 역량을 중심으로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학교 교육의 목표가 국가 대소사를 제대로 처리하는 능력의 구비로 설정되었고, 평가도 관련 주제로 작성된 논, 책에 기초해 수행됐다. 관리는 이렇게 학교에서 검증된 인재로 충원되었다. 학교에서 ‘논정(論政)’, 곧 국정에 대한 의론을 상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여지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셈이었다. 이는 학교를 논정의 공간이자 여론의 장으로 본 전통적 관념의 복원이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학교는 교육 연구 기능과 관리 등용 기능, 의회 기능을 겸한 유서 깊은 문명 장치로 다시금 우뚝 설 수 있었다.”(김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