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터 맥그래스가 들려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신학적 비유는 “더 큰 그림”의 위대함을 전한다. “교양의 안티테제는 편협한 정신이야. … 교양이 없는 사람은 어떤 경우든 무엇을 해야 좋을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지. 문제점을 넓게, 부족함 없이 파악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다치바나 다카시의 육성과 겹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들려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신학적 비유는 “더 큰 그림”의 위대함을 전한다. “교양의 안티테제는 편협한 정신이야. … 교양이 없는 사람은 어떤 경우든 무엇을 해야 좋을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지. 문제점을 넓게, 부족함 없이 파악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다치바나 다카시의 육성과 겹친다.
삼성그룹의 정유년 신년화두는 ‘장인정신’이다. “장인정신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일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일 자체를 즐기고, 자신이 가진 전문가적인 힘으로 주위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한다.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일에 몰입함으로써 과정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얻을 수 있다. … 전문성의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실행 속에서의 ‘정상 경험(Peak experiences)’이다.”(장원섭)
“미국 뉴저지에 있는 AT&T 사의 벨 전화 연구소는 우수한 연구원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EQ를 제창한 다니엘 골맨은 이 연구소의 인사 담당 중역자들에게 고위직 관리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평가 결과, 우수한 업적을 쌓고 고위직으로 승진한 연구원들은 그들의 입사동기들에 비해 특별히 머리가 좋거나 입사시험 성적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개가 평범한 배경의 사람들로, 공통점은 동료나 상사에게 인기가 많아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협조를 쉽게 받아낸다는 것이었다. (중략) 예로부터 ‘묻는 것은 한때의 부끄러움, 묻지 않는 것은 후세까지의 부끄러움’이라고 한다. … 어려움에 처했던 아사히 맥주를 재건한 히구치 히로타로 씨가 그러했다. 스미토모 은행 부행장에서 아사히 맥주 사장으로 옮겨왔을 때, 그는 머리를 수그리며 업계 선배들로부터 자문을 구했다고 하다. ‘아사히 맥주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지적받은 것을 하나하나 개선해나갔다.”(다카이 노부오, <3분력>, 2004, 132~135쪽)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의 능력이란 면에서 가장 중요한 교양이 무엇인지 전반적인 정의를 내려볼까? 우선 첫째로 ‘논리를 세우는 능력’이야. 그리고 그 계열로서 ‘잘못된 논리를 간파하는 능력’ 그리고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을 들 수 있다. 논리를 세우는 능력 안에는 ‘논리력과 표현력’이 포함되지. 잘못된 논리를 간파하는 능력은 동시에 ‘잘못된 논리를 반박하는 능력’이기도 해. 지금 대학에서는 이런 능력을 양성하는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과거에는 학생운동 등이 그런 장으로서 기능을 했지만, 지금은 토론 서클이나 사회과학계열의 서클 등이 그런 장이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둘째로 중요한 것은 ‘계획을 세우는 능력’, ‘계획을 수행하는 능력’,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조직하는 능력’이지. 현 사회는 어떤 분야에서든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없어. 목적을 달성하려면 여러 사람을 모아 팀을 구성해야 하니까 ‘팀을 구성하는 능력’, ‘팀을 움직이는 능력’이 중요하지. 세 번째는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 ‘정보를 평가하는 능력’, ‘정보를 이용하고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 넓은 의미에서의 이론 능력과 두 번째의 계획 능력, 세 번째의 정보 능력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지적 능력이 되는 거야.” 다케시타 노보루 전 수상은 이런 말을 자주 했지. ‘훌륭한 정치가란 관료 기구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사람이다.’”(다치바나 다카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2002, 229~232쪽)
Don’t struggle against the past.
Bataille de Dunkerque, 4 June 1940.
“I am not reciting these facts for the purpose of recrimination. That I judge to be utterly futile and even harmful. We cannot afford it. I recite them in order to explain why it was we did not have, as we could have had, between twelve and fourteen British divisions fighting in the line in this great battle instead of only three. Now I put all this aside. I put it on the shelf, from which the historians, when they have time, will select their documents to tell their stories. We have to think of the future and not of the past. This also applies in a small way to our own affairs at home. There are many who would hold an inquest in the House of Commons on the conduct of the Governments-and of Parliaments, for they are in it, too-during the years which led up to this catastrophe. They seek to indict those who were responsible for the guidance of our affairs. This also would be a foolish and pernicious process. There are too many in it. Let each man search his conscience and search his speeches. I frequently search mine. Of this I am quite sure, that if we open a quarrel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we shall find that we have lost the future. Therefore, I cannot accept the drawing of any distinctions between Members of the present Government.”(W. Churchill. To the House of Commons, 1940.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