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상의 국립 사회과학대학. 1949년 동경상과대학에서 히토츠바시(Hitotsubashi) 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꽃> 출간 두 해 전인 1923년 9월 관동대진재로 히토츠바시대학의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하였다.
일본 최상의 국립 사회과학대학. 1949년 동경상과대학에서 히토츠바시(Hitotsubashi) 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꽃> 출간 두 해 전인 1923년 9월 관동대진재로 히토츠바시대학의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하였다.
“결론은 제로섬이다. 수험생들의 부담과 경쟁을 완화하는 것이 최선인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조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 해답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특히나 요즘은 입시 개편 논의를 사교육계가 주도한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다. 수능으로 먹고사는 대형 학원들은 학종(학생부 종합전형)이 날조된 학생부에 기반을 둔 전형이라고 비판한다. 학종 서비스 전문 소규모 학원들은 수능의 문제점을 강조한다. 입시 개선책을 논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들 밥그릇 싸움이다. … 입시의 본령은 공부를 열심히 잘하는 학생이 원하는 대학·학과에 가게 하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하려면 저소득층 복지를 강화하는 것이 정도다. 사교육을 줄이려면 학교에서 교사들이 좀 더 열심히 가르치게 해야 한다. 인재를 양성하려면 투자를 해야 한다. 그런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입시를 약간 손보는 것으로 양극화를 완화하고, 사교육을 줄이며, 대한민국에 필요한 미래 인재를 길러내겠다고? 이건 사기다.”(경향신문, 오창민)
_ 대학입시는 늘 그렇듯 두 가지 의제로 수렴된다: 수월성과 형평성. 4차 산업혁명과 사회 양극화는 별다른 게 아니고 ‘오늘의 버전’인 셈이다. 위 칼럼은 형평성을 복지로 충족하고, 입시는 수월성에 집중하라 요구한다. 아, 이것이 경향의 논설인가. 논조가 완미하다. 경제로 못풀어 교육이 떠맡은 문제를 경제로 풀라고 하니 난처하다. … 아니다. 그저, 부디, 아무쪼록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끊는 저 간명함이 성취되길 바란다.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카는 케임브리지 밀레인에 있는 강연장으로 나가 가득 메운 청중 앞에서 강연을 했다. 신중한 준비 끝에 열린 카의 트레벨리언 강좌(G. M. Trevelyan lectures)는 인과관계와 우연, 자유의지와 결정론, 개인과 사회,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의 긴장 관계에 대한 독자적 견해를 밝힘으로써 오랜 논쟁에 크게 기여했다. 강연은 생생한 사례와 빼어난 논리뿐만 아니라 다음의 세 가지 문제와 관련하여 지극히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8년 전 ‘역사적 필연성’에 관한 오귀스트 콩트 기념 강좌에서 제기한 결정론에 대한 이사야 벌린의 비판을 강력하게 재반박하였다. 둘째, 미래의 어떤 지점으로부터 돌아봄으로써 역사의 객관성을 찾을 수 있다는 논쟁적 주장을 전개했다. 마지막으로 역사 서술에서 상대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앞의 두 가지보다 결코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상대주의에 관한 논의는 우선 벌린과 카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논쟁을 다시 촉발시켰다. 나아가 휴 트레버-로퍼가 주도하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프리 엘턴(Geoffrey Elton)을 비롯한 제도권 역사가들을 분개시켰다. 그들은 카의 논의를 전문 역사가의 기준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카의 강연은 지엽적이긴 해도 케임브리지대학의 역사 교과과정에 개혁을 가져왔다.”(363~364)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결정론에 관해 무엇을 말하였는가.
“역사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 때문에 답변을 내놓고자 한다면 쉴 수가 없다. 위대한 역사가 – 혹은 더 폭넓게 말하자면 위대한 사상가 – 란 새로운 것들에 관해서 또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첫머리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렇게 규정했다.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의 행위에 관한 기억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특히, 무엇보다도, 그들이 서로 싸운 원인을 밝히는 것.”(120~121)
“나는 결정론이란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있고 그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달라질 것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다른 식으로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념 - 이에 관해서는 논쟁이 없기를 바라면서 - 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결정론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행위의 문제이다. 원인도 없이 행동하며 따라서 그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란 … 사회의 밖에 존재하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추상이다. ‘인간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포퍼 교수의 주장은 의미가 없거나 거짓이다. 일상생활에서는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으며 믿을 수도 없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자명한 명제는 우리 주변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의 한 조건이다. 카프카 소설의 몽환적인 성격은 그 어떤 사건도 무엇인가 명백한 원인 혹은 확인될 수 있는 원인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인격을 완전히 분열시키게 되는데, 왜냐하면 인격이란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전제, 그리고 그 원인들 중 많은 것은 확인 가능하므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행동지침이 될만큼 과거와 현재의 패턴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가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옛날에는 자연현상이 분명히 신의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현상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을 불경스럽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사야 벌린 경이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인간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사고방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 사회과학의 발전수준이 이러한 부류의 논의가 자연과학을 퇴행시켰을 때의 그 자연과학의 발전수준과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129~130)
“결국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다시 한 번 탤컷 파슨스의 말을 빌리면,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들의 ‘선택체계(selective system)’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들의 ‘선택체계’이다.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중요한 것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낸다. 그리고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패턴에 합치시키는 역사가의 능력이다. 그 밖의 다른 인과적 전후관계들은 우연적인 것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후관계가 적절치 못하기 때문이다. … 클레오파트라의 코나 바야지드의 관절통이나 알렉산드로스가 원숭이에게 물린 것이나 레닌의 죽음이나 로빈슨의 흡연 등이 이러저러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군들이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름다운 여왕들에게 홀렸기 때문이라든가, 왕들이 애완원숭이들을 키우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든가,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길을 건너다가 죽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명제로서는 성립되지 않는다.”(145)
우리식으로 풀어 말하면, 외무부 고위 관리에서 지방 국립대 교수로 초빙되었다가 유력 주간지의 부편집인을 역임한 뒤, 재차 학계로 복귀하여 논쟁의 중심에 서는 인물. 아, 강준만이 아닌가. 소련사 14권에 필적하는, 미국사 17권 + 한국현대사 23권.
카는 “미래의 어떤 지점으로부터 돌아봄으로써 역사의 객관성을 찾을 수 있다는 논쟁적 주장을 전개했다.” 그는 역사의 객관성을 예측타당도로 치환하고 그 준거로 역사의 목적, 즉 진보를 내세웠다. 벌린의 표현에 착안하면 승자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다. 이것은 종말론적 사상이 아니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에 있다.”(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12월 <역사란 무엇인가>가 출판되자 벌린은 <뉴스테이츠맨>에 서평을 실어 카에 대한 새로운 전선을 구축했다. 이제 1940년대부터 시작되어 잠시 중단된 뒤 이어지는 전투에 벌린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서평은 ‘카 교수의 승전 부대(승자 중심) 사관’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벌린이 카를 처음 공격한 것은 오래 전에 그를 헤겔주의자로 비판한 일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칸트가 말하는 목적론에 가깝다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카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이 대목에서 “국가를 형성한 그런 민족만이 우리 눈에 띌 수 있다”라는 헤겔의 경구를 실제로 승인하고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신념을 재확인했다. “역사가는 승자든지 패자든지 간에 대체로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둔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는 크리켓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 역사를 장식한 것은 수백 점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지 점수를 내지 못했거나 실격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이런 주장은 벌린에게 좋은 공격거리였다. 벌린이 보기에, 카가 역사 속에서 보려고 한 것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었다. 벌린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간에 일어난 사실 그 자체만으로 그것은 좋은 것이다. 또 우리가 지나온 역사의 단계들이, 단지 그 목표가 실현되었다는 이유로 그것은 올바른 단계였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벌린은 이것이 “승전 부대의 이야기이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성취하였든지 간에 성취된 것은 진보라고 주장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카 교수의 생각에서 근본이 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중략) 서평에 대해 발표되지 않은 답글에서 카는 벌린을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있다. “나는 이 ‘승자-패자’의 문제로 여전히 당혹스럽다. 크리켓의 역사를 쓴다면 나는 잭 홉스(Jack Hobbs) 경의 2만 점 득점 기록을 다룰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나를 고득점자를 찬양하면서 공을 놓쳐 팀 내에서 역할을 다루지 못한 괜찮은 젊은 선수를 쓰레기로 취급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영국식 방식이라고 생각된다.”(381~383쪽)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_ 합신 김성수, 성서의 구속사적 이해. 그리스도를 매개로 구약은 신약과, 신약은 구약과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