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2344, 일반 1537, 영재 7(8), 과학 20, 국제 7, 외고 31, 자사 46(10+36), 자공 112
전국단위자율학교(2009. 3. 27.) 한일고, 공주사대부고, 익산고, 풍산고, 영양여고, 거창고, 거창대성고, 남해해성고, 창녕옥야고 / 9
전체 2344, 일반 1537, 영재 7(8), 과학 20, 국제 7, 외고 31, 자사 46(10+36), 자공 112
전국단위자율학교(2009. 3. 27.) 한일고, 공주사대부고, 익산고, 풍산고, 영양여고, 거창고, 거창대성고, 남해해성고, 창녕옥야고 / 9
Sur les cimes du désespoir d’Emil Cioran
“시오랑이 죽은 뒤 그의 단칸 아파트를 돌아보던 평론가 시몬 부에는 그의 책상 서랍에서 고인이 57년부터 72년까지 일상의 짤막한 단상들을 기록해 놓은 수첩 서른 네 권을 발견했다. 그 수첩의 내용물은 염세와 회의의 극단을 가장 빛나는 프랑스어로 구축한 시오랑 글쓰기의 우수리들이었다. 부에는 그것을 <수첩 1957∼1972>라는 제목으로 편집해 11월 초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내놓았다. 생전의 시오랑은 갈리마르 출판사의 전속 문인이었다. <존재의 유혹> <역사와 유토피아> <시간의 추락> <찬미 연습> 등 10여 권에 이르는 그의 모든 책이 갈리마르에서 나왔다.”(1997. 12. 11.)
“선생님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골칫거리의 시작이었고 그래서 늘 절망의 꼭대기에서 살았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20대의 선생님이 염세주의에 허우적대는 걸 보신 선생님의 어머니가 ‘네가 이렇게 불행해할 줄 알았다면 너를 낙태했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 삶의 무의미와 비참을 견뎌냈고, 고종명하셨습니다. 향년 84는 장수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박한 세월은 아닙니다.” “프랑스 소설가 생-존 페르스는 선생님을 ‘폴 발레리의 죽음 이래 우리 언어에 명예를 준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라고 불렀습니다. … 선생님은 어느 날 노르망디 디에프의 한 여관에서 말라르메의 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선생님은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선생님의 모국어에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읽어줄 사람이 많은’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결심을 지키셨습니다. …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쓸 때, 저는 제 생각을 그 언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제게 허락한 생각들만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제가 그 언어들을 너무 늦게 다루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허황한 꿈을 접고 제 모국어인 한국어로만 글을 씁니다. 선생님의 과장된 표현을 빌리면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제 모국어로 말입니다.” “한국에도 한국어로만 글을 쓰기 때문에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젊은 재능들이 수두룩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제 손녀 세대가, 늦어도 제 증손녀 세대가, 한국어와 함께 영어를 자유롭게 쓰기 바랍니다.”(2015. 10. 18.)
The Tree of Life · 2011, 원인을 연쇄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생리학자의 인종주의 반박, “당신네 백인들은 왜 그렇게 많은 화물을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뉴기니인의 화물숭배(Cargo Cult), 1532년 잉카제국 멸망, “천연두 환자가 쓰던 담요를 선물”, 균 · 보이지 않는 살수, “더러워서 이겼다”, 작물(화)와 가축(화), 지리의 첫 요소는 기후, 연간 강수량이 500mm 이하, 메소포타미아, 안나 카레리나 법칙, 하나만 결여되어도 가축화 불가, 정주, 점진적 면역
“2·28 대구 학생의거는 1960년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 독재에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마산의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