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9. 괴짜 수도승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도승은 새로운 천문학 책을 몇 번이나 읽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북쪽 학자의 말은 사실이다. 태양은 한자리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다.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생각은 모두 틀린 것이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쪽의 어느 천문학자도 망원경으로 별의 움직임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북쪽 학자의 말이 맞다. 둥근 대지가 움직인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양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그런 터무니 없는 말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어떻게 해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던 수도승은 결국 화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북쪽의 천문학자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남쪽의 천문학자는 재판에서 “내가 말한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6~47. 만일 톱니바퀴의 수를 줄이더라도 같은 움직임이 가능하다면 신은 곡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였습니다. 이심원과 주전원의 이중의 움직임을 이용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했던 토성의 역행을, 코페르니쿠스는 토성도 지구와 함께 돈다고 생각하면 지구가 토성을 초월한 형태로 돌아가게 되므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고 지동설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의 교정쇄가 나왔을 때 죽음의 자리에 있었다는 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도승 브루노는 지동설을 열렬히 지지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세계의 모습을 널리 알리고자 여러 곳에서 강의했지만 브루노의 생각은 당시의 천동설이나 성서의 가르침에 크게 반했기 때문에 1600년 2월 17일 로마의 캄포 디 피오리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신이 과학을 탄압한 슬픈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이어서, 목성을 돌고 있는 네 개의 위성을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확함을 확신했던 갈릴레이도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싸움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300~500년 전의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종교의 일방적인 결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 무렵의 세계는 점성술이나 연금술, 마술 등 괴상한 미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게다가 누구도 페스트균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페스트가 악마의 탓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어두운 시대, 즉 브루노가 죽음을 당한지 40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어린이들도 알고 있으며,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달나라에 갈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모두가 지동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알고 있는 것과 이해하고 있는 것을 구별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동설을 옳게 이해하고 있다면 천동설 시대의 미신인 마술이나 점성술을 믿고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동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앞에서 말한 천체 움직임의 이치를 이해할 뿐 아니라 천동설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으며,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에 마음이 끌렸을 때 틀림없이 잠들 수 없을 만큼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70세의 노인이 되어 무식한 재판관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갈릴레이는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했을까요? 하물며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화형을 당했던 브루노는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지구는 둥글고 움직인다”는 것을 아무런 감동 없이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미 지구본을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다시 한 번 지동설의 놀라움과 슬픔을 느껴 보기를 바라면서 썼습니다.
1543년 :
코페르니쿠스(1473~1543),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저술, 지동설을 확립함.
1572년 :
티코 브라헤(1546~1601), 새로운 별을 발견.
1597년 :
케플러(1571~1630), 화성 운행에 관한 연구를 시작.
1600년 :
브루노(1548~1600), 열렬히 지동설 지지.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짐.
1616년 :
갈릴레이(1564~1642), 종교재판에서 지동설 포기를 강요당함.
1632년 :
갈릴레이 불후의 명작 <천문 대화>를 발표. 그 해 두 번째 종교재판에서 굴복함.
1642년 :
갈릴레이가 사망한 이듬해에 뉴턴(1643~1727)이 출생한 것은 과학사의 우연이라 하겠음. 뉴턴은 1687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밝혀 지동설을 밝혀 지동설을 부동의 학설로 확립함.
_ 안노 미쓰마사, <천동설 이야기>, 한림출판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