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rch, 2010

March 9, 2010: 4:16 am: bluemosesErudition

“사외이사 선출 기준이 까다롭다? 은행이 잘했으면 이런 게 나왔겠나”(중앙일보, 100308)

“은행들의 이익단체인 은행연합회가 신동규 회장 취임 후 사실상의 관치 기관으로 변했다는 불만이 많았는데, 알고보니 회장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pariscom)

“인터뷰 내용으로 보면 관치가 아니라 전문용어로 meta-governance에 가깝습니다. 자율적 지배의 규칙을 짜주는 일이지요. 국가가 이 역할까지 내놓는 경우는 여간해선 없습니다.”(pepemoraz)

: 4:09 am: bluemosesErudition

“어휘는 ‘중립적 단어’가 아니라 역사문화적 맥락을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기호’이다. 본 사전은 문맥에 따라 고정된 뜻을 뛰어넘는 어휘의 관용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 민속학의 관점에서 보면 어휘는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 중에서도 속담은 구비 민속전승 문학의 한 장르로서 언어 사용자들의 지혜를 찾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구비 전승의 관점에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 세계의 속담들은 빤뚠Pantun에 그  기원이 있다. 일반적으로 4행으로 구성되는 빤뚠의 첫 번째 두 행은 각운을 맞추기 위한 꾸밈절이고, 나머지 두 행에 핵심이 담겨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Pergi ke hulu buah rambutan, Sayang durian tiada berbunga; Sesal dahulu jadi pendapatan, sesal kemudian tiada guna(전태현, 2008).”

March 8, 2010: 10:31 am: bluemosesErudition

“한 공동체 사람들의 완전히 이성적이지 않은 관습들에 근거하는 선행하는 Sittlichkeit가 있고, 통합적이고 이성적인 국가체계 안에 토대를 둔 후행하는 Sittlichkeit가 있다.” _ Terry Pinkard(1994). Hegel’s Phenomenology: The Sociality of Reason

“헤겔에 따르면, 자연적인 ‘삶’은 항상 ‘불평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일부가 다른 일부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진 채 올바른 유형의 사회적 매개 없이 행위자들이 만난다면, 결과는 완전한 상호 인정이 아닌 지배 관계, 즉 ‘주인과 노예’ 관계일 수밖에 없다.”(Pinkard, 2000[2006]: 233~234)

* 물화, 주인(강자)과 노예(약자)의 인정투쟁, 인륜 혹은 윤리: 위계에서 경계로?, 제3의 학습 工夫

: 2:37 am: bluemosesErudition

Robert Fulghum(1986)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는 간과할 수 없는 통찰을 제공한다. 1)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세계관을 뜻한다. 2) 세계관은 마음의 체제로서 영유아시절 구축된다. 영유아교육의 중요성을 되새긴다. 이러한 점에서 <고래가 그랬어>의 발간은 유효한 전략이다.

: 1:33 am: bluemosesErudition

1. Spirit: 왜 기도하지 않는가. 제 힘으로 견딜만하기 때문인가. 주께서 어찌 하실 것 같은가.

2. Heart: 주의 말씀과 나의 인생은 직결된다. 가장 취약한 자아의 전장에 영적 병력을 집중시키자.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대면하듯 영성 - 마음 눈 - 이 밝혀지기를 소망한다.

3. Body: “강해설교는 ‘우리가 어떻게 전하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전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계속 세상의 경향을 설교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필경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기 바라시는 치명적 진리를 놓치게 된다”고 역설했던, Roy Clements는 동성연애로 좌초했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의 저자 Gordon MacDonald를 기억한다. 거룩을 허무는 음란을 삼가자.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셉을 따라 필사적으로 피하자.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나는 누구인가?

* ‘아간’이 예시하듯, 교만과 정욕은 결국 ‘자신이 세속에서 원하는 것을 좇는 삶’을 형상화한다. 누구의 만족을 위해 살 것인가?

: 12:50 am: bluemosesErudition

Q. 학습을 공통분모로 하는 ‘교육’과 ‘훈련’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측 여부이다. 전자는 결과를 알 수 없고, 후자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A. “어떤” 학습인가, 여기에 해답이 있을 것이다. 학습은 [구획하는] 모델링과 [추동하는] 메커니즘에 따라 그 성질이 판이해진다. 참고: Pedagogy, Andragogy (or Heutagogy) etc.

: 12:32 am: bluemosesErudition

알아도 하지 않는다?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화는 무력하다.

March 7, 2010: 11:30 pm: bluemosesErudition

1. 실제 팩토리420에서 일했던 노동자 5명의 인터뷰와 3대에 걸친 세 여자의 드라마가 어우러진 영화 “‘24시티’는 3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50여년의 역사를 가진 팩토리420이 무너진 자리에 하루아침에 들어선 최상급 아파트 단지의 이름이다. 1958년, 1차 5개년 계획 경제가 끝나고 대약진이라는 정책을 내세운 중국은 중국 서남부 쓰촨성 청두에 팩토리420이라는 공장을 세우는데, 이로 3만 명의 노동자들과 15만 명의 그 가족들이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군수 사업이 점차 축소되면서 중국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세우게 되고 지난 2005년, 이곳은 중국의 거대한 변화를 상징하는 아파트 단지 ‘24시티’가 되었다. 둘째, 1년이 24절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하루가 24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지아장커 감독이 ‘24시티’라는 건물을 통해 중국의 변모하는 근대 역사와 함께 그 안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인민들의 일상을 담고자 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2. 의식화는 언제 일어나는가? 미시와 거시, 서정성과 사회성이 조우하는 일상의 역사를 극적으로dramatic 재현할 때, 관객은 개인의 고민과 시대의 고민을 별개의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 의식화, 다시 말해 동기부여란 이런 것이다. ‘24 city’를 교보재로 활용하자.

3. 그리고 지아장커(賈樟柯, 1970~)를 주목하자. 그의 첫 장편(1998) “<小武>는 중국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매치기 청년의 일상을 통해 근대화와 도시화의 문제를 다룬다. … 국가관리 경제체제가 물러가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들어서는 와중의 사회적 충격과 가치관의 혼란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화는 느릿느릿한 템포로 주인공의 거동과 그 주변을 보여준다. 지아장커는 <小武>를 통해 ‘중국인들이 물질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잃어가는 것들을 상기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고뇌하는 중국> 제2부 5장 “신분에서 계약으로 - 신의 배반은 어떻게 합법화되었나?”를 들춰보게 된다.

: 9:19 pm: bluemosesErudition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 성경관, 신론(성부, 성자, 성령), 인간관, 구원관, 교회관, 종말론 - 에 관한 對話. 무엇보다 일단 준비가 필요하다.

March 6, 2010: 5:18 pm: bluemosesErudition

인정에 이끌리는 자는 평시에 온화하나 전시에는 잔혹하다. 왜냐하면 정서는 여건에 동요하는 기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