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일레븐, 출-퇴큰 시 들르는 편의점 명칭으로 적당하다.
1. 레온 페스팅거가 1957년에 발표한 인지 부조화 이론(A Theory of Cognitive Dissonance)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행동은 보상 이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단히 놀라운 정신적 활동을 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2. 스캇 펙(M. Scott Peck)에 따르면 ‘악’은 자기성찰을 거부한다. “악이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 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 그 지배 관계로 가장 흔히 나타나는 것이 부모 자녀 관계다.”(160~161)
* “아빠, ‘악(evil)’이라는 말은 ‘산다(live)’라는 말의 철자를 거꾸로 늘어놓은 거예요.”(53)
1. “애도하는 기간이 지나니,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왔다. 그 여인은 이렇게 하여서 다윗의 아내가 되었고, 그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이 한 이번 일은 아주 악하였다.”(삼하11:27)
2.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할 수 없고 그로 인해 ‘화평케 하는 축복의 통로’를 소멸시킨다. 1809년 5월 21~22일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전의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헷 사람 우리야가 죽기 전까지 다윗은 패배를 몰랐다.
3. 타자의 얼굴을 외면한 자기에의 함몰. 외식적인 헌신은 무익하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4.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발산적 자기부인과 사랑의 동심원적 확장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성향이다. 그러나 난, 자신의 위신만을 중시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유익을 갈구하지 못하였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눅14:34)
* 일체의 조작(manipulation)을 삼간다. 다짐한다.
1. Observation : What he says
2. Interpretation : What he means
3. Application : What he wants
2010년 12월 8일 한나라당이 내년 정부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유아 예방접종비 예산 541억원 전액 삭감, 결식아동 급식 지원금 903억원 전액 삭감, 저소득층 에너지 보조 3,000억원 전액 삭감 등 80건의 복지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 “국공립 어린이집 1만개 확충하는데 2조원이 채 들지 않는다. 4대강 사업 예산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무상 예방접종하는데 598억원만 추가하면 되는데, 이는 4대강 보 하나 건설하는데 드는 900억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 한국의 복지지출은 OECD 국가 30개국 중 최하위이고, 공적 의료지출 29위, 사회서비스(비의료 서비스) 지출 29위 등으로 매우 낮은 상황이다.”
* 2007년 말 한국의 부채는 299조였고, 2010년 현재 국가채무는 407조원을 상회한다. 건설부양과 부자감세, MB정권은 토건호족의 정부이다.
Clemente Course in the Humanities
1. “이사야 벌린의 평가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게르첸(Alexander Herzen, 1812~1870)은 삶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데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벌린은 게르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자연은 마치 게르첸의 도덕체계의 균형을 회복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영혼에 한 가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 한 가지 정복되지 않는 기질을 조심스레 새겨 놓았다. 게르첸은 인간의 마음 속에 고상한 본능이 있음을 굳게 믿은 사람이었다.’ … 무력(force)의 속성인 차별성을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고상한 본능들’ 가운데 하나인 정당한 힘(power)이 지닌 포용성과 대비하는 방식으로 만성적인 가난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18~19)
2. 실험적인 인문학 교육과정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제이미 인클란(Jaime Inclan) 박사와 의논했다. 나의 인문학 코스 구상에 대한 현실성을 제대로 검토해줄 수 있는 경험과 자격을 갖춘 사람이 바로 인클란 박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는 빈민들, 그 중에서도 주로 라틴계 사람들에게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언어로 상담해주기 위해서 뉴욕에 로베르토 클레멘트 가족보호센터(Roberto Clemente Family Guidance Cneter)를 설립해본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 나는 허친스 총장 시기의 시카고대학교에서 이뤄졌던 많은 코스들을 모델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한 번에 90분씩 일주일에 두 번 수업, 소크라테스식 방법론, 배 모양 탁자에 앉은 학생들, 한 해 마지막에 종합시험 한 번, 질서정연한 외양 속에 자리한 자유스러운 기운 등에 관해서 말이다. … ‘좋아, 자네의 그 생각을 한번 실현하도록 해보세나.’ ‘이 실험적 코스를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그게 좋겠어. 그 지역 공동체 사람들도 이 이름을 편하게 여길 거야.’ 그는 로베르토 클레멘트 가족보호센터의 회의실을 강의실로 배정해주었다.”(205~207)
3. “얼 쇼리스(Earl Shorris)는 10여 년 전 미국의 한 중범죄자 교도소에서 만난 여성 재소자와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해 그동안 자신이 받은 ‘인문학 교육’에 대해서 심각한 도전을 받습니다. 뉴욕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교도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얼 쇼리스의 머릿속에는 인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본질적 질문들이 솟구쳤습니다. … ‘저는 이제 윤리적 민주주의(ethical democracy)가 제 화두의 해답일 수 있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윤리적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지속적인 빈곤 상태로 영원히 묶어두는 메커니즘(surround of forces)을 해체시키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가짐으로써 ‘위험한’ 존재가 되는 민주주의입니다.”(437~439)
*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부(富)란 무엇인가? … 자기의 이유로 살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인문학으로부터 온다.”(신영복)
Sabotage : Conscientious Withdrawal of Efficiency
베블런은 “공동체 전체의 효율적 생산 활동을 담보해 주는 지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화폐 가치를 가질 수 없으며, 또 자본도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생산 활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강조한다. 오로지 특정인이 그 공동체 전체의 지식을 ‘볼모’로 잡아 사회 전체로부터 ‘몸값’을 뜯어낼 때에만 이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지식이 특정인의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인 ‘자산’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떻게 이러한 ‘인질극’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가. 생산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공동체 전체의 지식은 경제 단계가 발달함에 따라 특정한 ‘사물’에 체현되기 마련이다. … 폭력을 동원한 지배 계급이 그 사물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설정하게 되는데, 이 근대적 소유권의 실질적 의미는 사실상 ‘자신이 그것을 사용할 권리’가 아니라 ‘남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권리’이다. 한 번 더 비유를 들자면, 지배 계급이 사회적 생산이라는 흐름이 통과할 수밖에 없는 기계나 장비 등의 ‘병목’을 잡아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 전체로서는 그것을 사용하기 위한 대가를 그 생산 수단의 소유자에게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되며, 이것이 그 장비로 생산된 재화에 대한 높은 가격과 그로 인한 높은 이윤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 중요한 함의가 있다. 자본 소유자가 이윤을 높이기 위해 하게 되는 일은 산업 생산을 한없이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율적 활용을 일정한 이윤이 보장될 만큼만 가동되도록 제한하는 깽판 놓기, 즉 베블런의 표현을 빌리면 ‘효율성의 주의 깊은 철회’(conscientious withdrawal of efficiency)라는 것이다. … 결국 베블런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이 생겨나는 대립선은 자본 대 노동이라기보다는 자본 대 사회”가 된다.
* 지난 11월 24일, 딸 아이의 페구균, 뇌수막염, 로타바이러스 장염 예방접종 비용은 32만원이었다. “공동체 전체의 효율적 생산 활동”을 저해하는 지적재산권 - ‘남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권리’ - 의 깽판 놓기를 실감하였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는 베스트팔렌 체제와 케인스주의에서 비롯된 ‘정의가 적용되는 범위가 근대 영토국가 내부’라는 인식이 오늘날 정의론을 위기에 빠뜨린 주범이라고 본다. 기존의 정의론이 천착했던 문제는 경제적 분배 또는 사회적 인정 등 1차원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지구화의 확대는 작금의 정의론이 가진 내용과 방법 모두에 혼란을 가져왔다. 예컨대 에이즈의 확산, 국제 테러리즘, 유전자 조작 곡물, 이주 노동자 등 영토국가의 경계를 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이전의 정의론은 더이상 보편적인 문법으로 작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정의를 확산하는 강력한 악효과까지 낳는다. 따라서 프레이저는 ‘3차원적 정의론’을 제기한다. ‘경제적 분배’와 ‘사회적 인정’을 묶고, 여기에 ‘정치적 대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representation)는 분배와 인정에 관한 투쟁들이 펼쳐지는 무대를 제공하는 장치다. 정치적 대표의 도입은 특정 대상을 배제하는 ‘대표 불능’의 부정의를 바로잡는다. 곧 분배와 인정을 위해 투쟁을 벌여야 할 자들이 공론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무대를 만드는 과정까지 민주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무 것도 새로울 게 없는 하나마나한 소리(하버마스5, 푸코7, 아렌트8)로 점철되어 있으나, 2(9)장 - The Politics of Framing: Reframing Justice in a Globalizing World - 은 검토할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