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2016

November 29, 2016: 2:51 am: bluemosesErudition

“우치다 타츠루는 교육자이자 무도인이다. 그는 레비나스 철학의 권위자이면서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에서 무도적인 의미에서의 ‘약함’과 철학자가 고찰하는 ‘무지’ 간의 공통적인 구조를 포착해낸다. 둘 다 변화하는 것에 대한 강한 억제를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그에게 무지는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지식으로 머리가 빼곡하게 채워져 새로운 지식을 더는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럼 무엇을 묻든 이미 알고 있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자신이 그간 사용해온 정보처리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려는 태도가 새로운 지식에 대해 무지한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지적 틀을 바꾸어야 입력 가능한 정보 - 차원이 다른 - 가 더는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입력될 수 없으니, 그의 아집이 스스로 무지를 자처하게 한 것이다. 즉 무지란 변하지 않으려는 태도, 배움을 저지하고 억제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칼 포퍼가 ‘진정한 무지는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얻기를 거절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것은 그 무지에 안주하려는 의지를 해체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무안하게 하고 당황스럽게 하고 어쩔 줄 모르게 하여 자신의 차원이 얼마나 낮은지 알게 하는 일이 교육이다. 무도인들게 ‘약함’ 역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려는 성향을 말한다. 몇 가지 이전에 없던 잔기술을 익히거나 심폐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변했다고 착각하는 정서가 약함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하드 디스크 용량을 증가시키는 것일뿐 근본적으로 OS를 버전업 한 것은 아니다. 생명은 시간을 통해 변화를 가져온다. 무지와 약함은 그 변화를 두려워하여 현재를 고수하려는 의지다. 그것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괴물을 낳는다. 자신만 죽을 뿐 아니라 많은 생명 현상들을 잠재우고 억압하고 숨구멍을 틀어막아 질식시킨다. 나희덕 시인의 시 <부패의 힘>을 만나면서 그 역설이 가진 메세지의 힘에 나는 움찔했다.”(박대영)

부패의 힘 _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November 28, 2016: 10:15 pm: bluemosesErudition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2) _ 비트겐슈타인은 하박국의 고뇌를 헤아렸을지도 모른다. 6.54와 7절 사이에서, 우리는 부단히 ‘무의미의 의미’가 되려 한다.

6.53 _ 올바른 철학적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 이를테면 철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들인 자연과학의 명제들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그 무엇을 말하고자 할 때 철학은 그에게 그가 사용하는 명제 속의 어떤 기호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철학을 가르쳤다는 느낌을 갖지 못할지 모르고 또한 이것이 만족스러운 활동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 방법이야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올바르며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54 _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 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7 _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하박국 2:20)

: 1:17 pm: bluemosesErudition

주사액이 든 작은 병

: 10:59 am: bluemosesErudition

X3116

: 10:50 am: bluemosesErudition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들처럼, 본능으로 아는 것 바로 그 일로 멸망합니다. 이들은 불만에 싸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십시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동정하되, 그 살에 닿아서 더럽혀진 속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

: 10:29 am: bluemosesErudition

“The end of the matter; all has been heard.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is is the whole duty of man.”(Ecclesiastes 12:13)

November 27, 2016: 11:01 pm: bluemosesErudition

“한줌의 잿더미에서 영원한 것을 찾은 나가이 다카시의 자전적 소설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시대적 상황에서 좌절과 고통, 기쁨과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저자가 쓴 소설 형식으로 쓴 자서전이다. 주인공 류우키치는 가톨릭 신자 집에서 하숙하며 의과대학을 다닐 때 신앙을 알게 되고 여성의 참모습을 하루노 안에서 느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류우키치는 물리학 방사능 연구로 백혈병에 걸리게 되고, 원폭으로 생명과도 같은 아내와 친구, 제자와 재산, 연구 자료를 잃고 폐허의 벌판에 병든 몸과 어린 자녀들만 남는 비통한 현실 앞에 선다. 애통함과 허무함으로 가득 찬 그는 신앙으로 일어나 모든 것은 변해도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 사랑에 감싸여 잿더미 위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는 류우키치의 모습은 인간에게 믿음과 희망의 삶을 일깨우는 하느님 나라가 영원함을 가르친다.” _ 우선, 성경에 정통하자.

: 3:26 pm: bluemosesErudition

미숙, 성숙(인지, 책임, 포용)

: 3:14 pm: bluemosesErudition

울부짖음을 듣고 공정하게 몫을 안배하라. 개혁은 배려다.

: 3:11 pm: bluemosesErudition

제사장의 나팔인 요벨(yobel), 히브리어에서 영어로 음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