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일반고인 A고에서는 전교 300명 학생들 가운데 5분의 4 이상인 85%가 수능과 관계없이 수시에 합격이 당연시되는데도 불구하고 학교가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하면서 학생들을 학교에 붙잡아 놓고 거의 방치하고 있다.”
“지방 일반고인 A고에서는 전교 300명 학생들 가운데 5분의 4 이상인 85%가 수능과 관계없이 수시에 합격이 당연시되는데도 불구하고 학교가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하면서 학생들을 학교에 붙잡아 놓고 거의 방치하고 있다.”
LA, four seasons, Jazz, theatre, City of Stars … “Someone in the crowd”
“자살 위험을 낮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살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자살을 언급하면 자살을 부추길지도 모른다는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자살에 대해 묻는다고 해서 세우지 않았던 계획을 세우는 경우는 적습니다. 오히려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는 것은 상대에게 깊은 고민을 털어놓아도 된다는 무언의 허가로 작용합니다.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어 긴장감을 낮추는 효과가 있습니다.” 다만, 미디어에서 해당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면 그것은 일종의 안내서가 될 수 있으니, 언론은 보건복지부(2013)의 <자살 보도 권고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Vision: Social hope combined faith and wish
경험과 기대. 스베틀라나 보임, 그리고 라인하르트 코젤렉. “합리적 예측이 위력을 잃을 때 정치는 마술이 된다.”(칼 쇼르스케)
隱忍自重, 明哲保身, 韜光養晦. 어느 것을 택할까 하다 세 번째 것을 고른다. 매너리즘(1530~1600), 그 뒤의 바로크(1600~1750).
쇤베르크가 고린도전서 13장을 묵상했다면, 불길한 징크스는 소실되었을텐데 … 13일의 금요일은 고약한 반그리스도적 발상 아닌가.
“If I speak in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but have not love, I am a noisy gong or a clanging cymbal. And if I have prophetic powers,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ll faith, so as to re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If I give away all I have, and if I deliver up my body to be burned, but have not love, I gain nothing. Love is patient and kind; love does not envy or boast; it is not arrogant or rude. It does not insist on its own way; it is not irritable or resentful; it does not rejoice at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Love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ends. As for prophecies, they will pass away; as for tongues, they will cease; as for knowledge, it will pass away.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but when the perfect comes, the partial will pass away. When I was a child, I spoke like a child, I thought like a child, I reasoned like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gave up childish ways. For now we see in a mirror dimly, but then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have been fully known. So now faith, hope, and love abide,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1 Corinthians 13:1-13)
차연(差延)의 “대안적인 번역어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은 김남두/이성원 교수가 제안한 ‘차이(差移)’라는 용어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것은 디페랑스라는 개념의 기록학적 측면을 표현하면서도 ‘차이’나 ‘차이’라는 역어와 달리 디페랑스가 지닌 두 가지 의미의 결합 역시 어느 정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역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단어 또는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디페랑스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낯설게 하기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차이(差移)’라는 역어는 다른 역어들보다 더 디페랑스에 충실한 역어로 볼 수 있다. 물론 ‘차이(差移)’라는 역어 역시 디페랑스가 함축하는 모든 측면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며, 독자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준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차이(差移)’는 기존에 제시된 번역어들 중에서 디페랑스라는 개념에 대한 가장 충실한 번역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분석하면서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 지닌 모순의 근원에는 문자기록에 대한 불신과 폄하의 태도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는 소쉬르를 따라 (기호) 체계 내의 항들은 실정적인 내용, 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항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소쉬르가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음소(phonème)를 중시한 데 비해, 디페랑스는 음성상의 차이의 조건이 문자기록상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자기록이야말로 ‘차이의 경제’를 (불)가능하게 해주는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밝혀준다.”
“소쉬르의 차이의 체계가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물고 있는 것에 비해, 디페랑스는 모든 차이가 ‘지연’의 작용으로서 ‘시간내기’(temporiser)와, ‘차이’의 작용으로서 ‘공간내기’(espacement) 운동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데리다가 말하는 ‘시간내기’는 쉽게 말하면 가령 전기밥솥의 타이머의 작용 같은 것을 의미한다. 타이머는 밤 12시에 이루어질 작용을 아침 6시까지 지연하는 작용을 한다. 또한 ‘공간내기’는 컴퓨터의 스페이스바의 작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알다시피 스페이스바는 간격을 띄우는 기능을 하는데, 데리다가 볼 때 로고스, 곧 의미의 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어를 구성하는 음절들 사이의 결합,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배치 및 기술적 간격 두기가 필수적이다.”
“모든 사물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로부터 볼 때, 모든 사태는 행동이 되고, 내가 되고, 기쁨이 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ㅡ동기ㅡ로부터 본다. 이것이 나의 새봄의 담배갑에 적은 새 메모다.”(<생활의 극복> 중에서, 김수영)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지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창작과비평>, 1968년 가을호, 4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