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19th, 2010

May 19, 2010: 11:33 am: bluemosesErudition

전쟁 비용(1338~1453, 영국-프랑스 백년 전쟁) 충당에서 비롯된 ’성직자 과세’ 갈등(1309~1376, 아비뇽 유수).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이 구별 없이 엉켜든 사태가 어떠했는지는 1323년의 사건이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아비뇽에서 교황에 오른 요한 22세는 일찍이 프랑스 왕 필립을 도와 거짓 모함으로 성당기사단을 박해한 바있다. 그는 성당기사단을 파렴치한 범죄조직으로 매도하고 타락한 성직자들과 손을 잡아 재물을 가로챘던 것이다. 천재적인 재정 전략을 발휘하여 세속 군주들의 권력을 대체하고, 재정적 힘으로 세상에서의 권위를 내세우던 교황의 입장에서는 청빈사상을 내세우는 교파가 무척이나 껄끄러웠을 것이다. … 이미 요한 22세에 의해 파문을 당하고 그에 대응하여 교황을 배교자로 비방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드비히와 이단으로 몰리고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손을 잡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말이었고, 이들은 교황파에 대립하는 황제파를 형성하게 된다.”

: 10:25 am: bluemosesErudition

1. “3세기의 위기는 235년에서 284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붕괴와 쇠퇴 현상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로마 제국내에서 25명의 황제가 난립했고, 제국은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의 집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는 결국 고대 서양 세계의 붕괴를 유발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한 제국을 한번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Augustus)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293년 두 명의 정제 외에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사두 정치 체제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체제를 Tetrachy(사두정치체제, 285~324)라고 한다.” “395년 테오도시우스는 죽으면서 자신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물려주었다. 로마 제국은 이로서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분리 되었으며 다시는 통합되지 않았다.”

2. 410년, “알라리크(Alaric)가 거느린 고트족(Goth) -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 - 의 침략으로 로마가 파괴되었다. 엄청난 재앙이었다.”

3. “프랑크 왕국의 베르됭(843), 메르센(870) 조약 이후 중세에서 근대 초까지 이어진 중앙유럽국가들의 정치연방체인 신성로마제국(962~1806[1808])의 해체를 선언한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를 건립하였다.”

: 12:04 am: bluemosesErudition

1. 지진 다발에 이어 유럽 재정 위기, 태국 내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미 멕시코만 기름유출, 중국 간쑤성 폭설(5. 17.) 등으로 급증하는 문명의 위기는 종교와 전쟁 이외의 다른 처방을 외면케 할지 모른다. 한반도의 천안함 사건이 도화선을 자처하지 않길 소망한다.

2. 국외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도 전쟁을 원하는 세력이 과반인 듯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소식에 광장을 빼곡 채운 군중들 틈에서 히틀러가 환호하고 있다. 목표 없는 생활을 연명하며 예술가와 영웅을 꿈꾸던 그가 자기 존재의 보잘 것 없음과 불확실한 상태에 대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명백히 드러났다. ‘그 당시 매 시간이 나에게 구원처럼 다가왔다.’ 그는 ‘벅찬 가슴으로 하늘에’ 감사했다고 한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온 것이다.”(Seligmann, 2004[2008]: 32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