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16th, 2010

May 16, 2010: 5:38 am: bluemosesErudition

“저는 어쩌면 이런 행동이 한나라당에게 집권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네들 지지자를 한꺼번에 결집시키고, 자기네들이 바라는 핵심 쟁점을 대중의 관심사로 확실하게 떠올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진보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는 여전히 발 벗고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 아닙니까.”(김훤주)

“13세기 초반 이래로 기독교 신학자 자신들 사이에서는 우리들이 믿는 것에 관한 질서와 우리들이 아는 것에 관한 질서 간의 분할선을 그리려는 추세가 증가하고 있었다. 알렉산더와 성 보나벤투라는 그리고 한결 더 명백하게 성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그와 같은 구분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장 강조하였다. 그러나 참다운 개혁가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도 아니며 또한 시기에 적절하게 그리고 시기에 맞지 않게 그러한 개혁의 필요성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다. 참다운 개혁가는 개혁을 달성하는 사람이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놀라울 정도로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E. Gilson, 1966[1983]: 71~73).”

: 5:06 am: bluemosesErudition

주권 기관인 민회에서의 동등한 발언권

: 4:39 am: bluemosesErudition

<국가>에 따르면 행복한 사회는 탈물질주의로 인민의 심성이 고양됨으로써 실현된다. 그러나 플라톤의 논의에는 경제와 정치 간의 매개가 부재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간항으로서 [황폐화된] 생활세계의 ‘윤리’를 설정한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게 툭하면 전통을 외치는 한국인 대부분이 아파트에 사는 걸 좋아하고, 자기 살던 동네를 마구 허물어도 돈만 주면 좋아하는 모습들이었다.” _ 올리버 그림(46)

: 4:21 am: bluemosesErudition

의사결정 체제인 민주주의는 적극적 지향을 내포하지 않는 반면, 공화주의는 공공선의 추구를 표명한다. 그렇다면 공공선은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는가? 진정한 공공성은 국가와 개인 사이에 존재한다. 국익은 공익이 아니다.

: 3:40 am: bluemosesErudition

1. “누군가를 다른 사람에 앞서 공적 책임을 갖는 자리에 앉히고자 할 때 고려하는 것은 그가 특정 계급에 속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가 가진 실질적 능력입니다.”

2. “‘번갈아 가면서 지배하고 지배받는 것’이 자유의 한 요소이며, 민주적인 정의의 개념은 능력, 실적에 기초한 평등이 아니라 사실 산술적 평등이다.”

3. “페리클레스가 생각하는 민주적인 평등 원칙은 능력과 실적을 분명히 인정하는 입장을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적인 평등 개념은 조건과 결과의 평등이라고 강조한다.”(David Held, 2006[2010]: 41)

4. 노예가 아닌 자유민의 민주주의는 ‘통치자가 곧 피치자’라는 점에서 [탁월함이 아닌] 산술적 평등을 전제해야 한다. 선발 후 추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엘리트 과두정으로 변질된다. “민회와 평의회는 ‘명문가’ 출신 - 연줄을 넓히고 이익을 추구할 충분한 시간을 가진 부유한 기득권 가문의 엘리트들 - 에 의해 지배되기 쉬웠다.”(David Held, 2006[2010]: 53)

5. “노동의 산물이 고용주에 의해 사적으로 전유되어 시장에서 팔리고, 노동자는 자기 생활의 조건과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갖지 못하며, 개인들은 경쟁과 소유에 의해 상호 대립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적극적 창조적 행위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상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평등을 중심에 두는 자유, 모두의 평등한 자유에 관심을 갖는 자유개념이다.”

* 평등은 자유의 도덕적 기초이다.

: 3:07 am: bluemosesErudition

1. “묵적의 학설[兼愛主義]에서 빠져나오면 반드시 양주의 학설[爲我主義]로 돌아가고, 양주의 학설에서 빠져나오면 반드시 유학으로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면 받아줄 뿐이다. 지금 양주나 묵적의 학자들과 변론하는 자들은 마치 뛰쳐나간 돼지를 뒤쫓듯이 몰아대고, 이미 우리로 돌아온 돼지를 뒤쫓아 발까지 묶는 식이다(<孟子> 盡心 下, 26).”

2. 민주적 리더십은 형용모순이다. 만약 이것이 존재한다면 인민은 모두 지도자여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와 개인의 구별이 폐기되고, 공과 사의 영역이 통합되어야 한다. “국가주의의 멸사봉공과 이기주의의 멸공봉사”가 지양된 상태는 어떻게 가능한가. 각자의 발전이 모두의 발전의 토대가 되는 사회가 도래할 수 있는가. ‘자기가 있되 자기가 없는’ 영혼의 전환 역시 자기 초월을 추동하는 “교육”이라는 리더십에 의거하지 않는가.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하는 전위(vanguard)는 [상술하였듯] 형용모순이다.

* 체제가 전위인가?

: 2:38 am: bluemosesErudition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Government)이 1690년에 출간되었다. 같은 해, 조선에서는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었다.

: 2:21 am: bluemosesErudition

<패치 아담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보며 ‘죽음은 모든 것을 상대화한다’는 진실을 상기했다. 후회가 남지 않는 최후의 진술을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