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ly, 2010

July 18, 2010: 10:56 am: bluemosesErudition

1. 민주주의 체제가 가동되려면, “민주주의의 기본적 인간관 - 자유롭고 평등하며, 적극적인 도덕적 행위자이자, 자기 결정과 정치적 선택 능력을 갖춘 존재 - 이” 충족되어야 한다. 개인의 도야와 사회의 공의를 공진화시키는 ‘실천적 지혜’(Phronēsis)는 무엇인가.

2. 보수적 항존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이 격돌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계몽적] 민주주의의 과제는 “숙고를 거친, 일관된, 상황에 얽매이지 않은, 사회적으로 입증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그런 선호가 형성되도록 장려하는 절차의 도입”이다. 혹자는 대안으로 숙의()를 거론한다.

3. Joseph M. Bessette(1980)에 의해 고안된 숙의 민주주의 - David Held(2006)의 분류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9번째 모델 - 의 요지는 “고정된 선호라는 개념에 작별을 고하고, 그런 고정된 선호를 어떤 학습 과정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 추상적이고 이미 생각해 놓은 합리성 기준을 단지 강요할 것이 아니라, ‘교사’와 ‘교사과정’의 역할이 제고되고 학습 과제가 학습 과정 그 자체 속에서 정해지는, 미리 정해진 답이 없는 지속적이고 열린 학습 과정으로서의 정치에 헌신하는 것이다.”

4. [공적] 숙의는 “이해관계의 언어를 이성의 언어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숙의 과정을 통해 “일정하게 형성된 선호들이 어떻게 분파적 이해관계와 연계되어 있고 그리하여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갖고 있는가를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타협적 선호 - 즉, 고정되고 불변일 것 같은 상황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기 위해 자신의 기대치를 낮춤으로써 형성된 선호 - 의 한계를 드러내 보여 준다. Joshua Cohen(1989)은 이를 ‘종속 상황에 대한 심리적 적응’이라고 불렀다. 지배적 정치 질서를 수용하는 여러 유형 중에서 ‘전통’이나 ‘실용적 묵인’에 기초하는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5. “사적인 선호를 공적인 조사나 검증에 견딜 수 있는 입장으로 전환시키는” 숙의는 “민주적 논증의 질과 정치적 행위의 정당화에 관심을 둔다. 숙의 이론가들이 초점을 둔 것은 시민의 자질 계발, ‘정제되고’ ‘사려 깊은’ 정치적 선호의 장려, 정치적 합리성 - 타인에 대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증명한다는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 - 등이었다.”

6. 요컨대 사실, 미래, 타인에 대한 ‘사려 깊은 선호’로 정리되는 숙의 민주주의는 부단한 대화를 통한 시민의 학습과 [정당화된] 공공선 지향을 추구한다. 도야와 공의의 청사진은 무엇인가? 숙의 민주주의에는 이것(The Vision of Politics)이 누락되어 있다. 숙의 민주주의는 달성해야 할 미래의 상태가 아닌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영속적인 운동으로서 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한다.

7. 그렇다면 숙의 민주주의를 견인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원주의 갈등의 완숙한 해소이다. 곧 ‘민주적 자치’다. 따라서 James Bohman(1998)에 따르면 “광의의 의미에서 숙의 민주주의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공적 숙의가 정당한 정치적 의사 결정이나 자치의 핵심 요소라고 생각하는 일군의 견해’로 정의된다.”

: 10:43 am: bluemosesErudition

고귀한 책도 천박한 상품이다. 추천도서 기사 게재 역시 200만원 상당(2010년 현재)의 홍보이다. 베스트셀러 산출은 5할 이상 마케팅에 의존한다.

: 8:09 am: bluemosesErudition

0. “멘탈리티는 정신적인 것을 주입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육체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생겨난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여서 그의 정신적인 것들 역시 육체적인 것의 반복적 습득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1. “창조적 인간의 반대말은 노예적 인간이다.” “과거 단순 사회에서의 노예가 어쩔 수 없이, 힘에 의해 만들어진 노예였다면 이제 현대인들은 그러한 변화에 쫓아가지 못한 채 무기력에 빠진 반자발적인 노예이다.”

2. “도대체 왜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살아가는가? …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힘 있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3. “나치 독일의 억업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했던 인간 군상들의 심리를 파헤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바로 이런 주제를 다룬 책이다. 자유로운 게 오히려 힘들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사는 게 편하다.”

4.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명령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소시민이 어떻게 해서 유태인 학살계획을 담담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리하여 아무 생각 없는 평범함이 바로 현대인의 악의 원천임을, 즉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증언해주고 있다.”

5. “고뇌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아무 생각 없는 이들이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박정희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 그렇게 살기가 귀찮으면 단순한 사회로 돌아가라.”

* 육화된 구조로 내재된 상식을 [집단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는 현실 가능한가?

July 17, 2010: 1:26 am: bluemosesErudition

1. “The Harvard Review of Philosophy에 실린” “이 인터뷰들은, ‘부분들은 오직 전체로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와 더불어 시작’하는 좋은 지점이 되어줄 것이다.”

2. “헨리 앨리슨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았던 훈련이 자연스럽게 (철학사가라는) 그런 방향으로 가게 했다’고 표현한 것처럼, 철학자가 탐구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관심과 체험이라는 개인적 요소와 교육 환경이라는 제도적 요소에서 복합적으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3. “그들이 철학적 반성과 개념을 통해 현실에 대한 실질적 개입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인문학의 위기’가 단순히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여타 학문에 대한, 인문학과 철학의 무용성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님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서구 철학자들은 철학과 인문학의 본원적인 시발점에 더욱 충실하고 있을 뿐, 인문학이 어떻게 실용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소크라테스 이후 지혜와 실천으로서의 철학이 분기되어나온 지점으로 돌아가, 철학이 실증 학문과는 다른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4. “이 책에 나오는 거장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거대하면서도 보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의 고전들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각자가 좋아하거나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진 철학자들의 책만 읽고 읊조릴 것이 아니라 그 철학자들이 읽은 철학고전들을 직접 읽고 그들의 문제의식과 전면적으로 대결하라는 것이다. … 네하마스의 말처럼 우리는 ‘철학자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그들을 읽고 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자신들만의 문제를 제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July 15, 2010: 11:07 pm: bluemosesErudition

‘시야가 一身에 국한될 때가 있다.’ 시선을 自己로 귀속시키는 ’함몰 웅덩이‘는 외부가 아닌 내면에 견고한 진(Strong Holds)으로 구축되어 있다. ‘내 속으로’(intra me) 그리고 ‘나를 초월하여’(supra me) 자아를 陶冶하는 유일한 법은 [도약이 아닌] 성화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July 14, 2010: 4:15 pm: bluemosesErudition

“구약역사 열왕들의 기록을 훑어보다가 가슴을 치며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자기 나라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았던 열왕들의 말로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믿음에 실패하고 나라의 운명은 마음먹은 것과 반대의 현상이 벌어집니다. 부강함을 목표로 삼고 정략결혼을 하지만 결국 가장 쇠약해집니다. … 순서를 바꾸면 인생도 뒤엉킵니다.” _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믿음으로 산다.”(합2:4)

: 7:30 am: bluemosesErudition

오랜 숙면이었다. 아래의 어둠에서 위의 빛으로 일어서기 원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선택을 자진 파기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July 12, 2010: 8:41 pm: bluemosesErudition

인간의 신뢰는 기대이기에, 실망을 태생적으로 품고 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은 예정된 필연인 것이다. 신뢰는 불가하다. 자신의 기대에 어김없이 타인이 부응할 수 없다. 신뢰가 망상이라니, 슬픈 고백이다.

July 11, 2010: 11:36 pm: bluemosesErudition

1. The Challenge of Establishing World Class Universities

2. The Great Brain Race: How Global Universities Are Reshaping the World

: 11:25 am: bluemosesErudition

0. 프레시안, 김영사, 예스24가 공동주최한 <괴짜 사회학 Gang Leader For A Day> 출간 기념 공개 대담(2009. 8. 28.): 김규항, 우석훈, 진중권, 홍기빈

1. 진중권: “촛불 때 입당한 당원들은 일거에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계급의 적, 즉 김규항의 표현을 뒤집으면 제 정체성을 잃고 추악한 세상을 그대로 온존시키려고 드는 진지하지 못한 당원이 된다. 아무 데서나 붉은 살 드러내는 이 좌파 바바리맨 쇼는 그냥 웃어넘기자.”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는 아마도 모욕을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 도대체 그 딱지 붙이기로써 내 주장의 뭘 반박하려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2. 김규항: “진중권 씨는 늘 논쟁을 싸움으로 만들어 대응할 의욕을 잃게 만든다. … 청년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날로 높아 가는데 오히려 진보정치의 영향력은 날로 위축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신문에 기고한 의견에 대해 그런 태도 - ‘꼴통들을 반대하고 경멸하는 사람들끼리의 카타르시스’(요 몇년 새 진중권의 ‘좌파활동’의 거의 전부이기도 한) - 를 보인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해서, 이번엔 충분한 대응을 할 생각이다. 아마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할  것 같다. 진중권 씨의 의견(이 실재한다면 ㅎ)을 경청하고 내 의견을 내는 일, 그리고 끊임없이 논쟁을 싸움으로 만드는 그의 습성을 다스리는 일.”

*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는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는 쾌락주의자고, 논리적으로는 금욕주의자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고, 문화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다.” 진중권은 정보를 취합하듯 신념을 규합한다. 그는 반정립을 위배한다. ‘A인 동시에 not A’는 아전인수의 전형이다. 다음을 상기하자. “파시즘은 수수께끼 같은 면모를 띠고 있다. 그 안에는 가장 균형 잡힌 내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위주의를 주장하면서도 반란을 조직한다. 그것은 당대의 민주주의와 싸우는 한편으로 과거의 지배의 회복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강력한 국가의 용광로인 척하지만, 파괴적인 분파나 비밀 결사처럼 국가의 해체에 아주 도움이 되는 수단들을 이용한다. 우리가 어떤 길을 거쳐 파시즘에 접근하든 그것은 어떤 것이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 다시 말해 A이면서도 A가 아닌 것임을 알게 된다.” 진중권은 부지 중에 파쇼적 심성을 자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왼쪽과 오른쪽, 서로 방향은 달라도 멘털리티는 동일하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포스트모던’의 근대비판이다.” 두 괴짜의 싸움판으로 전락한 한겨레는 무엇보다 필자를 엄선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