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12th, 2015

January 12, 2015: 7:57 pm: bluemosesErudition

“만약 누구랑 논쟁할 때 상대방을 완전히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선 상대방의 주장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합니다. 그다음 그 내용을 논파하면 됩니다.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상대는 재기불능 상태가 되죠. 상대방인 한 말 중에서 조그마한 실수를 가지고 딴죽을 걸거나 말꼬리 잡는 것은 어리석어요. 또는 상대방 주장의 약한 부분들이 여럿 있을 텐데 그것을 물고 늘어져 길게 비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재반박의 기회를 주는 셈이거든요. …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상대방을 완전히 논파한다고 해도, 이겼다는 쾌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방이 내 글에 설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대부분의 글은 자기편의 신념을 강화할 뿐 상대편을 우리 쪽으로 개종시키지는 못합니다. 특히 적대감이 쌓인 진영에서 주고받는 논쟁적 글들은 결코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싸움에서 이길 수야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기는 것과 설복시키는 것은 다릅니다. 논쟁에서 이겨봐야 자신의 호승심好勝心만 채워주는 거지요. 상대방을 설복시키지 못한다면 그 논쟁은 목적을 못 이뤘다고도 할 수 있어요.”

_ 고종석, 고종석의 문장2, 알마, 2014, 409~410쪽.

“영적 깨달음과 지적 수준은 별개다.” 이것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십분 이해한다. 박학다식한 영적 소경이 적지 않다. 도킨스의 교조주의적 무신론이 한 예다. 그러나 영성과 지성을 무관한 것으로 오도하는 뉘앙스에 동의할 수 없다. 그리하면 또 다른 해악에 빠지고 만다. 영성의 병폐는 결손된 인격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경건주의, 율법주의를 보라.

: 11:16 am: bluemosesErudition

“흑변은 출혈된 혈액이 소화관 내의 세균에 의해 분해되어 붉은 빛을 잃고 검은 색을 띠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소화관 출혈이 혈변으로 나타날지 흑변으로 나타날지는 출혈의 위치 및 출혈된 혈액의 소화관 내 체류 시간에 따라 결정됩니다. 즉, 십이지장과 소장의 경계 부위보다 상부에서 출혈한 경우에는 소장 및 대장을 거쳐 항문까지 배출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혈액이 소화관 내의 세균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져 흑변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반해 항문에 가까운 소장이나 대장에서 출혈한 경우에는 항문까지 배출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 흔히 혈변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위에서의 출혈이라 하더라도 대량 출혈이 발생하면 빠른 속도로 소장 및 대장을 거쳐 혈액이 항문으로 배출되므로 혈변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대장 출혈이더라도 출혈양이 적어 천천히 배출되면 흑변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혈액이 소화관 내에서 5시간 이내로 머물면 혈변, 14-20시간 이상 체류하면 흑변의 양상을 보입니다.”

: 11:00 am: bluemosesErudition

가짓수를 줄인다.

: 10:57 am: bluemosesErudition

“보통 미술사의 시대 구분에서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바로크 미술로 이행하는 사이(1530~1600)에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던 과도기적인 미술 양식을 말한다. 매너리즘이란 종종 성숙기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쇠퇴를 뜻하거나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을 일컫는다. 또 성숙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명칭 자체는 ‘스타일, 양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마니에라(maniera)’에서 유래했으며, 개성적인 양식이 아닌 모방이나 아류 등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퇴보에 도달한 전통주의’ 혹은 ‘정신적인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 등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국의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이라는 말보다 ‘후기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1935년 무렵부터 영국의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이 보여주는 긴장과 과장을 이 시대가 르네상스 시대와 같이 하나의 이상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가 아니라, 여러 경향들이 교차하며 갈등을 일으키던 위기의 시대였던 데서 오는 일반적인 불안의 반영으로 해석했다.”

* 전망 잃은 일상의 반복에서 전진하는 쇠퇴: 매너리즘에서 바로크로

: 10:03 am: bluemosesErudition

또 잃을까 근심하고, 더 갖고자 안달한다.

: 1:55 am: bluemosesErudition

성육신은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전제한다. “세상의 고난과 악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이천년 그리스도교 신학의 큰 난제였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 속에 왜 악이 존재하며 세상의 고난은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의 문제는 수많은 신학자들의 난제였다. 이 난제는 이천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채 수많은 가설들만 쏟아 내었다. 칼 바르트 역시 악과 신정론의 문제의 근원으로 무(Das  Nichtige)를 언급했지만, 이 무의 기원을 설명해 내지는 못했다. (중략) 1980년의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Trinitat und Reich Gottes)와 1985년 출간된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Gott in der Schopfung)은 이 무의 기원을 놀랍게 밝혀낸 탁월한 저술이었다. 몰트만은 유대교의 카발라 전통을 깊이 연구하면서 … 무의  기원을  찾았는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이론에서 발전시킨 침춤(Zimzum) 이론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제한하는 자기제한(Selbstzurückhaltung)의 행위이다. … 피조물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기제한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자기제한은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큰 은총의 행위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통해 창조의 공간이 생겨났고 자유로운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자기제한과 자기철회를 통해 피조세계에는 절대 무의 가능성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르트가 답하지 못했던 무에 관한 몰트만의 해석이다.”

_ 김명용, 세상을 바꾼 신학(『희망의 신학』 50년, 몰트만 신학의 공헌에 대한 연구), 2014, 4~5쪽

: 1:47 am: bluemosesErudition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은 자신과 대상(selfobject) 사이의 거울 경험을 공감 즉 심리적 산소라 명명하였다. “공감은 정신의 성장에 산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공감은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없으면 죽는 것이다.”

두 청년에게 한 사과는, 심리적 산소를 공급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 즉 공감의 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