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lfhart Pannenberg, 1928 ~ 2014
어떤 이는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앞장선 이로, 또 어떤 이는 신앙의 이성화 작업에 몰두한 인물로, 또는 지나친 헤겔리안으로, 또 어떤 이는 교부 시대 및 중세의 수많은 교의들을 백과사전식으로 파낸 고고학적 조직신학자로 소개한다.
1944년 미군의 폭탄으로 베를린의 집이 폭발해 버리는 경험을 했던 시기, 그는 도서관에서 음악에 대한 책 한 권을 찾았는데 바로 니체의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이었다. 이는 15세였던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45년 1월 6일,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판넨베르크는 소위 ‘빛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음악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거대한 빛이 무한한 시간동안 그를 빨아들이는 듯한 경험이었고 그 경험 내내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판넨베르크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듯한 경험이었고 결국 그의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는 데 자극이 되었다.
1947년 그는 잊을 수 없는 한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독일 고전 문학을 가르치던 랑에 박사(Dr. Lange)였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이는 니체가 묘사한 기독교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으며 정신적으로 강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주 괴테의 삶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특히 괴테와 그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제로 삼았으며, 그의 강의에 판넨베르크는 매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해 나갔다. 임마누엘 칸트에 대해 공부하면서 ‘순수이성비판’에 상당히 매료되기도 하였다. 베를린에서 세 학기쯤 보내었을 때, 더 많은 철학과 문학 서적들을 탐독하였고, 특히 칼 마르크스의 휴머니스트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갔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저서들을 읽는데도 시간을 매우 많이 보냈다. 하르트만 세미나 가운에 스토아 철학자들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소크라테스 이전 고전 철학자들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이 판넨베르크에게는 하이데거의 고전철학 인용에 비판을 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가 보기에 하이데거는 많은 고전 철학을 인용했던 <숲길(Holzwege)>과 같은 책에서 철학자들의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헤겔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사 시절을 보내면서 헤겔의 신에 대한 아이디어에 천착하였는데, 판넨베르크가 판단하기에 그의 개념이 현대철학자들의 주장 가운데 가장 기독교에 근접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헤겔리안이 아니냐고 비판하곤 하는데, 단언컨대 판넨베르크는 헤겔리안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헤겔에 대한 근본적 의심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역사 개념에 관련하여서 판넨베르크는 헤겔보다는 빌헬름 딜타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봐야 한다.
1940년대 후반 판넨베르크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베를린의 첫 선생이었던 하인리히 포겔(Heinrich Vogel) 교수에게서 소개받았다. 포겔 교수는 바르트의 학생이었다. 판넨베르크가 1948년 괴팅겐으로 학교를 옮겼을 때, 거기서 바르트의 강한 영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교회교의학> 3번째 책까지 탐독하였다. 여기서 그는 바르트에 크게 매료되었는데, 지금까지의 철학 공부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신론의 삼위일체적 관점 때문이었다.
바젤에 머물면서 바르트가 신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에 판넨베르크는 지쳐 갔다. 그가 보기에 바르트의 신론에는 철학적 섬세함이나 명확성이 떨어져 보였던 것이다. 특히 바르트가 성서의 문구들을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독단적인 것처럼 보였다.
판넨베르크는 철학자 칼 뢰비트(Karl Löwith)의 역사에 대한 강좌를 듣게 되는데, 거기서 뢰비트는 현대의 역사철학에서 어거스틴의 역사신학과 그 성서적 뿌리에까지 추적해 나갔다. 비록 그의 관심이 역사 철학의 재건이었지만, 또한 판넨베르크는 역사에 관한 성서적 신학의 재구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1년 <역사로서의 계시>가 출판되었다. 어떤 신학적 혁명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던 기획은 아니었지만 바르트와 불트만 쪽 사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부각되었다. 즉 하나님의 행동으로 등장한 역사야말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이 논쟁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1961년부터 1967년까지 마인츠에 머물렀던 시절 판넨베르크와 그의 역사로서 계시라는 기획에 대한 비판이 엄청났으며 판넨베르크는 그와 함께 했던 하이델베르크의 그룹과 함께 이를 방어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신학이 단지 신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하기에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