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10th, 2017

May 10, 2017: 11:07 am: bluemosesErudition

박정희/박근혜, 전두환/노태우, 노무현/문재인

: 11:03 am: bluemosesErudition

Representation 문제는 이를테면 re-pre-sentation 재현으로서의 반복이라는 문제다. 물론 이것은『브뤼메르 18일』의 첫머리에 언급되어 있다. “헤겔은 어딘가에서 모든 위대한 세계사적 사건과 세계사적 인물은 말하자면 두번 나타난다고 하였다.”

보나파르트는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가 현실을 형성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실천한 최초의 정치가였다. 본래 그는 그 존재 자체로는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표상 이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보나파르티즘이 실현하려고 한 것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계급대립을 행정권력에 의해 해소하는 것, 혁명을 이후 영원히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가 쓴 ‘나폴레옹 사상’이다.

보나파르트는 모든 자를 대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말 위의 생시몽’이라고 이야기된 것처럼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경제공황으로 타격을 받은 자본가 계급을 대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에 대해 가부장적인 은인으로서 나타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급에게서 빼앗아오지 않고는 어느 계급에도 베풀 수 없었다.

: 2:07 am: bluemosesErudition

“예측했던 대로 출구조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문재인)

: 1:25 am: bluemosesErudition

詩란 무엇인가. 못 보는 것을 보고 못 듣는 것을 듣기. “항상 본질이 문제되는 겁니다. 진실한 시인에게 문제되는 건 실로 그 시의 본질입니다.” “여운이 있어야 합니다. 감동의 진동이지요, 지성의 광휘이지요, 인식의 희열이지요. 에즈라 파운드가 얘기했듯이 단순한 산술이 아니라 영감을 가진 산술이지요. 그 비밀, 그 매력을 시인은 모름지기 발견해내고 체득해내지요.”(조병화)

“시에 미혹되어 살아온 지 30년이다. 여전히 시는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으므로 다만 ‘시적인 것’을 탐색하는 것으로 소임의 일부를 다하고자 한다. ‘시적인 것’의 탐색이야말로 시로 들어가는 가장 이상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담론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시의 성채를 위해 ‘시적인 것’을 반죽하거나 구부러뜨릴 수도 있다.”(안도현) 위 글에서 ‘시’를 ‘신’으로 바꿔 읽어보라. … 시인은 시가 왔을 때에만 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그 이전에는 시적인 것을 대략 말할 뿐이다. 설교자의 하나님 경험과 증언도 시인의 그것과 비슷하다.”(정용섭)

경험의 수수께끼. 그 괄호 속 실재. “독일어 Wirklichkeit는 지금 여기서 실재하는 것, 현실적인 것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미래에도 참된 것을 가리킨다. …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정용섭) 실재계의 일부를 상징계로 포섭하는 언어의 노작. 이것이 詩인가.

“옷핀에 긁힌 바탕색 이면의 기이한 물고기”, “삶 속에 있는 순간적인 죽음들”, “좋은 시의 요체는 비(非)시적인 혹은 반(反)시적인 일상사의 급소를 급습해서 매몰된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조하는 것이다.”(이성복)

이성복의 <극지의 시>에서 재인용한다. “시는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한다.”(밀란 쿤데라) 그 순간의 실재는 빛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영혼은 시를 통해서 무덤 너머에 있는 모든 찬란한 것들을 엿볼 수 있다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 보들레르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죽음 뒤에 얻게 될 휴식처를 상상했고, 동반 자살한 연인들이 죽음 뒤에 이루게 될 완전한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죽음 속에서만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적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빛을 볼 수는 없지만, 죽는 날까지 내내 시를 씀으로써 저 빛 속의 삶과 가능한 한 가장 가까운 삶을 이 땅의 우여곡절 안에서 실천하려고 했다.”(황현산)

저 빛은 언제 임하는가. “우리가 시를 말할 때 기승전결을 말하지 않습니까. 근데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디냐면 ‘전’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시작해서 이것을 발전시켜 나가다가 그것을 뒤엎는 순간이 바로 그 ‘전’인데요. … 아주 짧은 시를 쓰면서도 바로 이 ‘전’을 만들어내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서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다가 이것을 획기적으로 뒤엎는 글도 있습니다. 대개 여기에 해당하는 글, 여기에 해당하는 구절을 내가 좋아합니다. 그런 구절을 읽으면 ‘아, 여기도 희망이 하나 있구나. 아, 여기도 어떤 가능성 하나가 있구나.’ 생각하지요. 그게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어떤 ‘전’을 만들어낼 때가 이 세상에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는 순간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황현산)

“시에는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을 모아 시를 만드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신형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어떤 것.’ 이 말을 내가 참 좋아한다. 그것이 시가 아닐까. 시를 쓰며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할 때가 가장 기쁘다.”(오은)

“묵호항 덕장에 널린 황태. 마음의 빨랫줄에 걸린 단상.”(박준)

“현상학적 시를 통과하면 다른 내가 된다.”

“몇 갈래의 길이 있다. 전복, 포착, 토로.”

“통각의 사제가 인생이라는 화마에 놓은 맞불”

“어제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재밌는 것을 발견했어요. 재밌다는 말은 나는 모든 것을 시로 연결해 버릇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재밌었다는 말입니다. 거북이가 말입니다. 아가리를 짝 벌리는데 제 혀를 마치 벌레처럼 보이도록 만들더군요. 그러니까 물고기가 그게 벌레인 줄 알고 잡아먹으려다가 도리어 거북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아요.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개미를 잡아먹고 사는 새가 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은 다른 힘센 새가 자기 알을 훔쳐 먹으려고 나타나면 뱀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럼 다른 새들은 이게 진짜 뱀인 줄 알고 도망을 가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진실에 의해 보호받는 것도 또 진실을 갖고 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저런 식이 아닌가 진실이라는 것은 본래 가짜입니다. 아마도 라깡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as if의 형식 즉 마치 뭐뭐처럼 이라는 직유의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했었죠. 거북이가 제 혀를 벌레처럼 보이게 만들고 새가 뱀의 흉내를 내는 것 그것은 허구이지요. 마치 뭐뭐처럼 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허구로서의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기획하게 합니다. 시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삶 자체가 허구라면 시는 허구 속의 허구입니다. 그런데 이 허구 속의 허구를 만들어서 삶이라는 허구를 뒤집거나 혹은 무화시키는 것 그런 것이 시겠지요.”(이성복)

“바닷가에 어느날 갑자기 시체가 밀려온다고 쳐보시면 파도로 그 시체에 가장 먼저 달려드는 건 파리입니다. 그 파리가 바로 시인의 자리이지요. 시인은 결국 뭔가를 발견하는 존재인데 그때 발견해야 될 것은 삶 속에 있는 순간적인 죽음들입니다.”(이성복)

“백지에 크레파스로 여러 색을 칠하고 그 위에 검정색을 짙게 입힌 다음 옷핀 같은 것으로 긁으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들이 나타난다. 가령 물고기의 입은 빨갛고 꼬리는 초록색이며 지느러미는 노란색이다. 스스로 바탕색을 칠하고서도 그처럼 기이한 물고기가 나타날 줄은 아무도 짐작 못했을 것이다. 비유컨대 우리의 삶과 세계를 구성하는 상식은 옷핀에 긁히기 전의 검정색이며 문학은 상식이라는 검정색 위에 상처 입히기다.”(이성복)

“시적 자아의 예기치 못한 성화의 도정, 그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발하는 형이상학적 전율”

“진술의 욕망을 잘 연마된 묘사가 절제하고, 묘사의 욕망을 진술이 견제한다. 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터져 나온 말들은 당연히 밀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장력을 잃지 않고 투명하게 응등그린 말들이 삶의 페이소스와 소멸의 시간대를 비출 때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떨리는 풍경이 된다.”(최두석, 박수연, 손택수)

“통찰력, 그리고 의지, 소통하려는 의지죠,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시력! 제시력이에요. 제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예술가인 거죠. 예, 때때로 우린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을 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모두 예술가가 될 수는 없어요. 소통하려는 의지, 강렬한 욕구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그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런 의지가 조건이라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보다 많을 거예요. 결국, 예술적인 방법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죠. 그래요, 예술은 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죠. 이 제시의 패턴이 고유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걸로 우리는 어떤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평가를 내려요.”(송선호)

“연안에서, 소멸의 시간대를 비추는 호명의 빛”

“내면의 더듬이(자아), 바깥의 안테나(타자), 안 쓰던 근육”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하는 글”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David Orr)가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신형철)

“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파블로 네루다)

“너는 시에게 실려 가고, 나는 산문을 끌고 간다.”

“如是我聞과 子曰”

“어디론가 저도 모르게 흐른 뒤, 내적 긴밀성을 더한다. 단, 갇히지 않을 만큼”

“결국, 무엇을 어떻게”

“연필로 밑줄을 그었을 뿐인데 그 선을 따라 숨통이 트인다. 이러면 시지.”(김민정)

“소멸을 비추는 빛, 소멸에 맞서는 불”

불멸을 염하는 노이로제

“시는 가장 개인적인 언어로 가장 심층적인 세계를 가장 무책임하게 주파하는 장르다. 그래서 당대 언어예술의 맨 앞자리에 있을 수 있다. 나는 늘 난해함에는 관대했지만 태만함에는 냉담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편한 시를 써달라고 시인들에게 떼를 쓰는 비평가들이 답답했다. … 간혹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내가 옹호하려 한 것은 난해한 시가 아니라 다른 언어, 다른 세계, 다른 삶을 말하는 시였고, 내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쉬운 시가 아니라 관습적이고 태만하고 타협적인 시였다.”(신형철)

입상진의(立象盡意)

“결국 애가 쓴 시일 뿐인 랭보의 시가 왜 중요하냐고 누가 방금 물었다. 좋은 시는 늘 실패담이다. 그런데 아주 비장하고 순결한 실패담이 랭보의 시다. 그래서 중요하다.”(황현산)

“김수영은 좋은 시를 정의하며 ‘사상이 새로운 언어의 작용을 거쳐 자유를 행사한 경우’라거나 ‘침묵의 한걸음 앞의 시’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어. ‘죽음의 음악이 울린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라고도 했지. 반면 난해시처럼 꾸며 쓰는 시들 앞에서는 ‘언어에 대한 고통 이전에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라다’라며 혹평을 했어. 그뿐만 아니라 삶과 마음의 밑바닥에서 자연스럽게 끌어올려내지 않은 참여시들도 배격했지.”(이시영)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지역의 길, 뜻밖의 만남, 오랫동안 다가오는 것을 지켜본 이별,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유년 시절에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 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기분을 언짢게 해드린 부모님(다른 사람이라면 기뻐했을 텐데), 심각하고 커다란 변화로 인해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질병, 조용하고도 한적한 방에서 보낸 나날들, 바닷가에서의 아침, 그리고 바다 그 자체, 곳곳의 바다들, 하늘 높이 소리 내며 모든 별들과 더불어 흩날려 간 여행의 밤들!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같이 다른, 사랑을 주고받는 수많은 밤들, 진통하는 임산부의 외침, 가벼운 흰옷을 입고 잠을 자는 동안 자궁이 닫혀져 가는 임산부들에 대한 추억도 있어야 한다. 또 임종하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봐야 하고, 창문이 열리고 간헐적으로 외부의 소음이 들려오는 방에서 시체 옆에도 앉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안의 것을 다 고백하고 나서야 오는 빛 … 내가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나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빛을 기다릴 것이다.”(최지은)

“시를 쓰고 있으면 쉽게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시가 암호처럼 보이면, 암호를 풀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시는 더 이상 읽히지 않게 될 거 같아요. 사실은 아무것도 완전히 해결된 게 없는데도, 암호가 풀려버린 기분이 들면 사고가 거기서 멈춰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쉽게 읽히고, 쉽게 들키지 않는 시를 쓰고 싶어요.”(황인찬)

무의식의 시침질은 시가 아니다.

“시의 자궁은 고백과 묘사, 그리고 발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발견이다. 발견을 외면하는 고백, 발견을 생산하지 못하는 묘사, 에너지가 없다.”(이문재)

“여기서 말하는 ‘대단한 모래정원’이란, 그것을 보았을 때 받는 강한 충격, 뜻밖의 표현, 모래정원을 계열적으로 보았을 때의 전개의 의외성, 미적인 감동 등을 말합니다.”(가와이 하야오)

“내가 말하는 시는 운율과 박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밥 깁슨의 빠른 공처럼 움직이며 적시에 도약하는 언어, 기습과 마찰과 속도로 낡은 세계를 깨뜨려 여는 언어를 의미한다.”(월터 브루그만)

“빛은 아무리 긁어모아 쌓아도 높이가 없고 아무리 파도 깊이가 없지만, 결국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었다.”(신용목)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이 말해졌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은 아직 전혀 말해지지 않은 듯하다.”(남진우)

“현상학적 관점에서 계몽된 일상언어”(아메데오 지오르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것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삶 전체에 어떤 의무를 부여하지만, 물론 그 의미는 그 사람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한 모든 헛된 관심으로부터 그를 구한다.”(키에르케고르)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롤랑 바르트)

“시인은 신비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말해져 버리면 시인은 은행원보다도 신비하지 않을 것이다”(앨런 테이트)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허수경)

“작품 속에서 부시를 비판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장내의 웃음이나 박수는, 상영 전후 무어 감독을 향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상영 중의 야유에 가까운 웃음에서는, 양질의 지성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거북함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부시가 상대를 업신여길 때 짓는, 품성이 결여된 경박한 웃음과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중략)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 잠깐 동안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제작자의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짜 적은,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고,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고이즈미)만을 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고레에다 히로카즈)

“나는 나를 가지고 나도 몰랐던 걸 만들었고”(페르난두 페소아)

“나에게 시를 쓸 수 있게 해준 것은 길이었다. … 몸 속 깊이 숨겨진 내면을 꺼내는 일이고,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김기택)

“시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반성이에요. 어떻게 반성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지 마세요. ‘왜 나는 반성하지 않는가’도 반성이에요.”(이성복)

“사실 모든 시는 정치적이야. 김수영이 모든 좋은 시에는 죽음의 리듬이 있다고 말한 것, 그게 바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야. 정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일인데, 공적이라는 것은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자기 죽음 같은 거거든. 일단 죽음을 통과해야 당대의 미학을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건) 공적인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 문학은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계속 물어야 해.”(김정환)

“저한테 시를 쓰면서 가장 설레는 지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시를 쓰는 순간 어딘가를 건너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극을 쓰거나 스토리를 쓰는 작업을 할 때는 뭔가를 채워간다는 느낌이 강한데, 시를 쓸 때는 내가 모르는 어딘가를 건너간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 운동성. (중략) 시차는 제가 몸을 통해 얻은 것인데, 외국 여행을 갔다 오면, 몸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을 건너고 넘어서는 느낌이 들거든요. 시차時差가 주는 시차視差가 발생하는 거죠. 그 순간에 매우 강렬한 포에틱이 발생해요.”(김경주)

“시는 5편을 쓰면 5개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라서 질리지 않아요.”(김승일)

“시는 벽이 있어서 더 알아야 할 것 같은 글인 거죠. 남도 중요하지만 자기 시에 감동할 수 있는 순간이 가장 중요해요.”(박성준)

투수의 구질은 몇 가지로 국한된다. 그러나 구속, 구위, 구력은 무한하다. 시도 그렇다.

그들은 시로 문학을 하는 것이고 저는 사회학을 하는 겁니다.

“게으름 피우지 마세요. 왜냐하면 게으르면서 동시에 호기심을 가질 수는 없거든요.”(강경화)

“시는 속에 있는 타자가 나와서 말을 해야 하는데, 학자들은 초자아가 강해서 타자가 나와서 시를 쓰기 어려워요.”(황현산)

“시는 우리 자신과 언어의 대화예요. 그러니까, 언어가 하려는 얘기를 귀담아들어야 해요. 언어는 너무 중요해서 늘 잊혀요. 작가는 언어를 배려해주는 사람이에요.”(이성복)

“호프트Hooft라는 네덜란드 시인은 사랑했던 연인을 잃은 뒤 비문을 쓰면서 첫줄은 네덜란드어로, 다음은 라틴어로, 그다음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다시 라틴어, 이탈리아어, 마지막으로 다시금 네덜란드어로 썼다고 한다. …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철학자 앙뚜안 베르만은 ‘자신의 글을 수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쳐여만’ 모국어로 자기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비평의 시는 용어가 아니라 통찰에 있다. 발견은 정보가 아닌 것이다.

“풀냄새라고 있지요? 풀을 베었을 때 나는 냄새. 사람들은 그것을 상쾌하고 신선하다고 여기지만, 실은 베인 풀이 옆의 풀에게 경고하는 게 풀냄새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옆의 풀이 도망칠 수 있겠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그럼에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문학이요 시 아닐까 싶어요.”(이성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