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ugust, 2017

August 27, 2017: 11:42 am: bluemosesErudition

“아프리카라는 이름을 공식화한 곳은 로마야. 로마가 아직 제국의 시대로 접어들기 이전인 기원전 3세기 였어. 로미는 페니키아의 후손이 튀니스에 만든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였지. 이 전쟁이 바로 포에니전쟁이야. 로마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카르타고를 속주로 삼고, 당시 로마의 장군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아프리카라고 불렀어. 물론 로마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지역에 대해 알지 못했어. 그 아래쪽으로 훨씬 큰 땅이 있다는 걸 짐작도 못했을 거야.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조차 자기들이 사는 땅을 아프리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몰랐어. 부족 단위로 생활을 하던 아프리카 남쪽의 종족들은 20세기가 될 때까지 아프리카라는 이름을 몰랐다는구나.”

“천하의 군신(軍神)이자, ‘군사적 목표 저 넘어’까지를 통찰했던 스키피오는 정치 무대에서는 끝내 패배하고 만다. 로마 원로원은 젊은 로마를 세계무대에 올려놓은 주인공에 대한 질시로 스키피오에게 뇌물수수죄를 씌워 정치적 파산을 유도한다. 그의 나이 쉰 초반이었다.”

August 26, 2017: 9:11 pm: bluemosesErudition

오사카 몽슈슈, 도지마롤. 아리타 이츠로(有田逸郎)가 2003년 오사카 도지마호텔 <몽슈슈>에서 총주방장 재직 시절 도지마롤 창안

: 2:38 pm: bluemosesErudition

배의 중간 부분으로 이 구역에 짐을 싣는다.

: 1:38 pm: bluemosesErudition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는 기묘한 소설이다. 문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서는 이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고, 그녀가 대표한다는 남부 고딕 양식이라든지, 그로테스크한 문체 같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첫 몇 장을 넘기면서 이내 이 작품이 가진 기묘한 매력에 사로잡혔다. 평범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이야기의 모든 것이 묘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랄까.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기독교의 언어들이 때로는 살짝, 때로는 극단적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거기서 오는 묘한 불편함이 나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전하는 목사. ‘맹인이 보지 못하고 절름발이가 걷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죽은 채 있는’ 그의 교회. 그의 교회는 거기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 1:23 pm: bluemosesErudition

유능과 무능, 순정과 부정

August 25, 2017: 11:05 pm: bluemosesErudition

현등. 야간에 항해하는 배가 다른 배에게 그 진로를 알리기 위하여 양쪽 뱃전에 다는 등. 오른쪽에는 녹색을, 왼쪽에는 붉은색을 단다.

: 11:03 pm: bluemosesErudition

불등걸. 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숯등걸

숯등걸. 숯이 타다 남은 굵은 토막

: 9:58 pm: bluemosesErudition

이상의 최초 발표작품인 ‘선에 관한 각서’, 이 연작시는 사람이 빛보다 빨리 달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몽상을 기하학적이면서도 비의적인 방식으로 표명한 작품이다. 인간의 빛—되기에 대한 상상이 시간여행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근대과학의 일반 공리들을 의문에 부치는 비판적 성찰로 이어지며, 그 공리들 위에 구축돼 있는 ‘현재—과거—미래’라는 통념적 시간관을 재조정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서, 현재를 사는 인간의 삶에 인식적 충격과 상상력의 혁신을 초래하는 결과를 도모하겠다는 것이 이 설계도—시의 핵심적인 취지다. 일단은 ‘빛’에 대한 시이되,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간관, 새로운 인간관에 대한 시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이상은 직선처럼 미래를 향해서만 흘러가는 근대적 시간과는 달리 과거로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에서 어떤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식민지 조선은 역사철학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만주사변(1931)과 상해사변(1932) 이후 조직화되기 시작한 식민지 본국 역사철학의 예속적 객체 혹은 하위주체로 호명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에 걸맞은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피식민 주체들에게 부과되었음은 물론이다. 역사의 의미․법칙․방향에 대한 독자적인 메타 서사를 갖고 있는 주체에게 그와 같은 정체성의 강요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고. 정체성의 분열을 낳을 것이다. 이상의 초기 시인 「이상한 가역반응」에서부터 이미 나타나는 주체의 병리적 분열은 그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런 맥락에서 볼 때 ‘황(獚)’이라는 이름의 개를 소재로 한 이상의 미발표 유고 연작은 이상 문학의 병리성이 어떻게 역사적‧정치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텍스트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상 문학의 병리성은 의도된 병리성이고, ‘연기’와 ‘위장’의 한 양상이며, 정치적 알레고리로 파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역사의 출구와 삶의 출구가 동시에 봉쇄돼 있는 상황에서 이상은 ‘운명’이라는 주제를 글쓰기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다. 「역단」과 「위독」 연작에서 이상은 운명이라는 형식으로 이미 쓰여 있는 삶을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다시 쓸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천착했다. 이후 이상이 시에서 소설로 이동하게 된 것, 그중에서도 특히 연애담의 형식으로 이동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여러 편의 연애담에서 이상은 자신의 존재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토로하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작품이 삶보다 앞서 나가서 삶을 미리 완성하도록 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넓게 보면 이와 같은 글쓰기는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고자 한 19세기 후반 댄디즘의 존재미학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당대의 역사철학적 지배담론을 끝까지 거절한 지점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종결하기 위한 주체화 전략이자 문학적 실천의 마지막 형식으로 평가될 수 있다.

: 8:46 pm: bluemosesErudition

포르투갈어. 비로드. 벨벳

: 2:31 am: bluemosesErudition

한화이글스의 김태균은 별명이 많다. 그래서 ‘김별명’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