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등. 야간에 항해하는 배가 다른 배에게 그 진로를 알리기 위하여 양쪽 뱃전에 다는 등. 오른쪽에는 녹색을, 왼쪽에는 붉은색을 단다.
현등. 야간에 항해하는 배가 다른 배에게 그 진로를 알리기 위하여 양쪽 뱃전에 다는 등. 오른쪽에는 녹색을, 왼쪽에는 붉은색을 단다.
이상의 최초 발표작품인 ‘선에 관한 각서’, 이 연작시는 사람이 빛보다 빨리 달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몽상을 기하학적이면서도 비의적인 방식으로 표명한 작품이다. 인간의 빛—되기에 대한 상상이 시간여행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근대과학의 일반 공리들을 의문에 부치는 비판적 성찰로 이어지며, 그 공리들 위에 구축돼 있는 ‘현재—과거—미래’라는 통념적 시간관을 재조정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서, 현재를 사는 인간의 삶에 인식적 충격과 상상력의 혁신을 초래하는 결과를 도모하겠다는 것이 이 설계도—시의 핵심적인 취지다. 일단은 ‘빛’에 대한 시이되,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간관, 새로운 인간관에 대한 시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이상은 직선처럼 미래를 향해서만 흘러가는 근대적 시간과는 달리 과거로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에서 어떤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식민지 조선은 역사철학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만주사변(1931)과 상해사변(1932) 이후 조직화되기 시작한 식민지 본국 역사철학의 예속적 객체 혹은 하위주체로 호명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에 걸맞은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피식민 주체들에게 부과되었음은 물론이다. 역사의 의미․법칙․방향에 대한 독자적인 메타 서사를 갖고 있는 주체에게 그와 같은 정체성의 강요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고. 정체성의 분열을 낳을 것이다. 이상의 초기 시인 「이상한 가역반응」에서부터 이미 나타나는 주체의 병리적 분열은 그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런 맥락에서 볼 때 ‘황(獚)’이라는 이름의 개를 소재로 한 이상의 미발표 유고 연작은 이상 문학의 병리성이 어떻게 역사적‧정치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텍스트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상 문학의 병리성은 의도된 병리성이고, ‘연기’와 ‘위장’의 한 양상이며, 정치적 알레고리로 파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역사의 출구와 삶의 출구가 동시에 봉쇄돼 있는 상황에서 이상은 ‘운명’이라는 주제를 글쓰기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다. 「역단」과 「위독」 연작에서 이상은 운명이라는 형식으로 이미 쓰여 있는 삶을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다시 쓸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천착했다. 이후 이상이 시에서 소설로 이동하게 된 것, 그중에서도 특히 연애담의 형식으로 이동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여러 편의 연애담에서 이상은 자신의 존재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토로하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작품이 삶보다 앞서 나가서 삶을 미리 완성하도록 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넓게 보면 이와 같은 글쓰기는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고자 한 19세기 후반 댄디즘의 존재미학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당대의 역사철학적 지배담론을 끝까지 거절한 지점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종결하기 위한 주체화 전략이자 문학적 실천의 마지막 형식으로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