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세계를 설명하고 세계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하느님 없이 직접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규정성과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실재’reality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에 어떤 규정을 투사한다.” 문명의 뒷면에는, “내적인 혼란과 부조화의 상태라 할 수 있는 절망”이 꼭 그만큼 쌓인다. 키에르케고어는 <<공포와 전율>> 마지막 장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 사건(Akedah)을 분석한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명령에 따라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하였다.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거친 아브라함에게 윤리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 “윤리는 이제 신앙을 통해, 즉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고 정지된다.” “아브라함은 맨 먼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고 그 이후에야 바로소 윤리 체계, 한때 매 순간 그를 지배했던 윤리 체계로 나아간다.”
2.
그리스도 안에서 교의학과 윤리학의 일치로 성도를 견인하는 바르트의 책임은, 나이젤 비거의 유비 혹은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교훈으로 요약된다. “기다리며 서두르기” _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속 세례 요한은 유독 긴 검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손 뒤로 라틴어 성서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한 3:30) 바르트는 그리스도를 힘써 가리키는 세례 요한의 긴 손가락에서 신학이 나아가야 할 길과 목적을 보았다. 바르트는 이 그림을 평생 사랑했고, 책상 정면에 이 그림을 걸어 두었다. 그리스도교 성현들의 글과 씨름하다가 고개를 들면 늘 이 그림이 바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르트의 제자인 갓세이John Drew Godsey는 이 그림을 이해한다면 바르트 신학의 심장을 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뤼네발트의 세례자의 가리키는 손을 따라가며 바라볼 모험을 감행할 것인가? 우리는 그 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안다.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란 점을 즉각 덧붙여야 한다. 저 손이 말한다. 바로 이분이다!”
3.
행위와 존재(Akt und Sein). 부제는 ‘조직신학 내에서의 초월철학과 존재론.’ 이 책은 본회퍼가 1929년 베를린 대학에 교수자격 논문으로 제출한 것으로 주제는 ‘계시 이해’이다. 그 당시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은 각기 계시를 이해하는데 두 개의 철학적 해결 방법인 칸트의 초월철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영향을 받았다. 초월철학의 영향을 받은 바르트는 신 중심적 입장에서 행위를 강조하고, 존재론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인간 중심적 입장에서 존재를 강조하며 계시를 이해하였다. 본회퍼는 계시를 이해하는 바르트와 불트만의 행위와 존재의 두 대립적 입장이 교회 개념을 통해 극복될 수 있으며 행위-존재의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공동체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디트리히 본회퍼)
4.
“니버는 자신이 현실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초월성과 내재성, 순진한 이상주의와 냉혹한 현실주의 사이에서 니버는 ‘불가능한 가능성’을 견지했다. 하여 혹자는 그의 사상을 이상적 현실주의, 현실적 이상주의라 칭한다. “이레니우스는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image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모습likeness을 따라 성장하도록 요구받는다는 것을 구별한다. 하나님의 모습은 파괴되었지만 형상은 파괴되지 않았다.” “정의를 위하는 인간의 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불의를 행하는 인간의 경향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라인홀드 니버)
5.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신정통주의에 기반을 둔 실존주의를 표방한다. 그는 불안을 ‘정답 없는 삶’이라 칭하고 연이어 피투와 기투를 각각 ‘내러티브’와 ‘덕’으로 치환한다. 하우어워스가 내러티브와 덕을 강조하고, 라인홀드 니버를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신학자는 인간이 놓여 있던 자리에 다시 하나님을 모신다. 그렇기에 “하우어워스는 복제할 수 없다.” “근대성은 ‘당신이 어떤 이야기도 갖지 않았을 때,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이야기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근대성에 담긴 이야기며 우리는 이를 자유라 부른다. 그러나 여기에 맞서 그리스도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것, 즉 피조물이다. 당신은 이를 결정할 수 없다.’”(스탠리 하우어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