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ugust 23rd, 2017

August 23, 2017: 10:44 pm: bluemosesErudition

몽파르나스 역에서 피레네 산맥 쪽으로. 1994년, 김화영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 번역 후기

: 4:37 pm: bluemosesErudition

교육부(2017. 1.) _ “올해 2학기 시도교육청 5곳에서 미네르바 스쿨을 시범 도입한 뒤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 “학교에서 직접 개설하기 어려운 과목의 경우 쌍방향 온라인 실시간 수업을 신규 도입(5개 시도 시범운영)해 학생의 학습선택권 확대”, “해외의 쌍방향 온라인 수업 사례(미네르바 스쿨) : 물리적 교실 없이 100% 실시간 온라인 화상 강의를 통해 토론/협력활동 위주의 수업 실시”

미네르바 스쿨은 미국에서 개교한 ‘혁신’이라는 수사가 붙어 마땅한 대학이다. 2014년 가을 개교한 이 대학은 학력 나이 국적에 관계없이 입학해, 강의실 없이 온라인으로 세미나 수업을 진행한다. 학생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매 학기 기숙사를 옮겨 다니며 학습에 참여하고, 기숙사에서 학생들끼리 토론도 하게 된다. 최근 늘고 있는 MOOC 강좌는 일방성 때문에 학습의 깊이를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방송통신대학도 마찬가지다. 미네르바 스쿨은 쌍방향 학습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한다.”

: 2:22 pm: bluemosesErudition

14. 두 분 모두 의사였다. 나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아버지는 1939년 폴란드 군에 징집되었고, 결국 러시아 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군이 카틴Katyn에서 자행한 폴란드 군 장교 학살 사건 - 1940년 소련이 자행한 폴란드인 대량학살 사건으로 폴란드의 군 장교와 경찰, 대학교수, 성직자, 의사 등 2만 2천 명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 때 살해되었고, 바로 그 무렵에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치 점령기에 의사로 일할 수가 없어 빵 굽는 일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다시 의사 일을 시작했다.

14.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7년, 바르샤바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유럽 학제에서는 5년 과정을 마치면 처음 받는 학위가 석사였다. 철학ㆍ사회학과 소속이었던 나는 같은 과의 많은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몇 과목만 더 이수하면 철학과 사회학에서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가서야 비로소 정치학 공부를 시작했다.

15-16. 당시 학술지 <철학사상>Mysl Filozoficzna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실증주의 간에 논쟁이 붙었는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열세였다. 그러나 1948년 스탈린주의가 폴란드를 장악한 이후, 이 논쟁은 이른바 행정 처분으로 해결되었다. 학술지는 폐간되었고, 모든 실증주의자들이 대학에서 쫓겨났다. (중략) 분석 마르크스주의 -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로, 마르크스즈의 이론도 ‘정상’ 과학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 - 의 진짜 기원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바로 1957년의 폴란드에 있다. 실증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주로 “‘장기적 이익’long-term interests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들이 ‘계급’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왜 계급은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더 이상 ‘행정 처분’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력적인 격동의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던 셈이다.

17. 노스웨스턴 대학의 정치학과에는 뭔가 신비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아주 대단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내가 배운 것은 거의 없었다. 그곳에서 뭔가를 더 배우기에 나는 이미 교육을 많이 받은 상태였다.

23-24. 내가 이 연구에서 알게 된 핵심은 개혁주의가 노동자들에게 합리적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이익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데 있다. 언젠가 변화가 생겨서 육체노동자가 전체 인구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할 것이라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순수 노동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란 불가능하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것만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그들은 포괄 정당catch-all party이나 다계급 정당multi-class party으로 활동해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의 특수 이익을 넘어 광범위한 대상에 호소해야 한다. 두번 째로 알게 된 것은, 마이클 월러스틴과의 공동 연구과정에서 내린 결론으로, 노동자는 소득분배와 경제성장이라는 목표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맞교환trade-off 상황에 직면하여, 어떤 조건에서는 분배 요구를 제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최적의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임금상승을 제한함으로써 노동자는 자본가들의 투자를 유도하며, 투자는 경제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는 이익을 보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민주주의의 계급 타협 전략은 합리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28-29. 1986년 6월에 나는 바르샤바에 있었다. 가끔 그랬던 것처럼, 저명한 공산주의 개혁가 비아테르Jerzy Wiater라는 친구와 산책을 나갔다. 그 친구가 “우리는 약간의 개방을 위해 지방 수준에서 선거를 실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네”라고 말했다. “선거를 한다면 당신들은 패배할 거야”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알다시피, 문제는 이길 것이냐 질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잃을 것인가야”라고 대꾸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오! 대단한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9. 나는 1988년, 브라질에서 열린 회의에서 동유럽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해 언급했다. 사람들은 내게 고함을 질러 댔고, 배신자, 미친놈, 계급의 적이라는 비난이 난무했다.

29-30. 민주주의 이행에 대한 당신의 연구는 게임이론을 이용해 전략적 선택을 형식 이론을 통해 분석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로서는 민주화 연구에서 게임이론이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었는데, 게임이론으로 전환한 이유가 무엇인가? / 나는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꽤 전략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중략) 나는 먼저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상황을 전략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을 모델로 만든 후 내가 어떤 해답을 찾게 되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게임이론을 사용한 것은 전반적인 나의 방법론적 성향 때문일 것이다. 즉,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주장을 만들고, 형식 이론의 도구를 이용해 그 주장이 실제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성향 말이다. … 내가 게임이론을 사용하게 된 것은 내 방법론적 성향과, 민주주의 이행에 참여하는 정치적 행위자들이 전략적으로 사고한다는 내 직관이 합쳐진 결과다.

31. 나는 게임이론이, 특정한 조건, 특정한 이익 구조 아래에서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도구라고 보았다.

32.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게임이론으로 분석해 어떻게 형식화할 것인가에 대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눴나? 당시에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게임이론으로 연구한 문헌이 없었다. /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화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제안하는 것이 생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설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제시하는 몇몇 측면이 꽤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3. 내 모델은 세 가지 이유에서 투박하고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첫째, 25년 전만 해도 정치학에서 게임이론을 사용한 연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둘째, 내 기량이 부족해서 더 잘하기는 힘들었다. 셋째, 내겐 내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 정도면 충분했다. 다른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33-34. 신생 민주국가가 많아졌다는 것은 민주화를 통계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만큼 민주주의로의 이해 사례가 많아졌음을 의미했다. 미처 깨닫지는 못했지만 민주화에 대한 접근법에 있어서 우리는 극도로 베이지언적이었다. [베이스Thomas Bayes가 주창한] 베이지언 통계는, 기존의 지식과 신념을 바탕으로 어떤 사건의 발생에 대해 연구자가 할당한 사전 확률에 비추어 데이터를 분석한다. 이런 관점은 통계적 추론에 대한 고전적 접근법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변수들 간에 관계가 없음을 상정하는 영가설(귀무가설)과는 달리, 변수들 간의 관계에 관한 가설들을 평가한다.

35. 요즘 들어 많은 논문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에서 민주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부정확한 통계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체제 이행은 1차 마르코프 과정first-order Markov Process - 현재의 사건이 이전의 모든 상황들과는 관계 없이, 오직 가장 최근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 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다시 말해 이행의 가능성은 가장 최근의 조건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역사에 따라서 달라진다. 과거 체제의 역사를 통계에 대입해 보면, 경제 발전과 민주화 사이의 관계는 사라진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민주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40. 나는, 설명이 필요한 사실이 무엇인가를 먼저 확인하고 난 뒤,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경제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정형화된 사실”stylized fact - 수많은 맥락에서 경험적 사실이라고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관찰 결과를 말한다. 1961년 자신의 논문에서 이 말을 처음 도입한 니콜라스 칼도어는 경제 성장에 대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모델들을 비판하고 이론의 구축은 개개의 세부적 사실보다는 폭넓은 경향에 집중해 유의미한 사실들을 요약하면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과정으로부터 도출된 폭넓은 경향을 가리켜 “정형화된 사실”이라고 불렀다 - 을 제시한 후 그것을 설명하는 아주 복잡한 모델을 제시한다. 나는 이런 글들을 보면 “그런 사실은 없다”라고 반응하곤 한다. 그래서 내가 설명하고 싶은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모델을 글로 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44. 민주주의로부터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서로 죽이지도, 정부에 의해 살해되지도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포퍼(Popper 1945)와 보비오(Bobbio 1984)로 돌아가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서로 죽이지 않도록 하는 체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나는 1973년 칠레의 반 아옌데 쿠데타 결과를 보면서 이런 민주주의 개념에 이르렀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으며,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어떤 정책도, 그것이 대량 학살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무책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최소주의적 견해는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좌파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면 이용했으며, 도움이 안 되면 거부했다. 그러나 1973년에 나는 민주주의가. 최우선으로 지켜져야 할 가치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내 생각의 가장 큰 전환이었다.

47. 나는 경험적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관한 밀리반트의 저작(Miliband 1969)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돈이 정치에 개입하면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으로 변환되고, 정치권력은 다시 경제권력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의 질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에 대한 돈의 접근을 규제하고 있는 법과 실제 현실을 살펴봐야 한다.

49. 당신의 가장 유명한 방법론 저작은 튜니와 함께 쓴 <비교사회 연구의 논리>(Przeworski and Teune 1970)다. 그 책이 기여한 바는 주로 무엇인가? / 미국인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갈등이 있는지를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세 가지가 있다. 물, 학교, 도로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갈등’이라는 말을 인도어로 가장 가까운 단어로 번역해 인도에서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우리 지역은 서로 평화롭게 산다. 서로 죽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인도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평화와 화합의 상태, 그리고 서로 죽고 죽이는 양 극단의 상태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개념 세계에는 제한되고 조절된 ‘갈등’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설문이 문자 그대로 번역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기술적 용어에 있어 국가 간 등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튜니와 내가 생각해낸 것은 국가 간 다른 척도를 이용해 의미를 통제하는 방법이었다.

50-51. 만약 <비교사회 연구의 논리>를 다시 쓴다면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 지금은 반사실적 가정counterfactuals - 사실과 반대되는 명제를 가정해 봄으로써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의 인과성을 추론하는 방법 - 이 비교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렇다면 어떤 것인 올바른 반사실적 가정들인가? 어떻게 그 조건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가? 그래서 비교 방법론 책을 다시 쓰게 된다면 표본 선택 편향selection bias - 무작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례를 추출하는 연구에서 나타나는 체계적 오류 - 을 다룰 것이다.

53. <민주주의와 시장>(Przeworski 1991) 4장은 경제개혁의 과정을 분석한 것인데, 어떤 까닭인지, 내가 급진적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지하는 것처럼 읽히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다.

54-55. 정치 이론 분야의 고전을 읽는 것은 내개 매우 중요하다. 나는 고전에서 가설이나 역사적 정보, 위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완전히 새로운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 미국 정치학의 수많은 의제들이 떠오를 것이다. (중략) 루소와 콩도르세는 내게 매우 중요한 지적 원천이다.

57. 오래전에 내 친구 욘 엘스터Jon Elster가 비형식적ㆍ연역적 논증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가정만 말해주면 바로 결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천재들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결론을 수학적 모델로 검토해봐야 그들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런 비범한 사람들을 알고 있지만, 그런 종류의 비형식적 연역 방식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 나는 연구 과정의 초기부터 기호를 적기 시작한다. 물론 이 기호들의 대부분은 책이나 글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저 내 생각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다. 나보다 수학을 더 잘 아는 내 딸은 내가 너무 일찍 모델을 만들고, 수학으로 뛰어들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딸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형식화를 시작할 때 직관과 그 형식화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만들어진 모델이 기대했던 답을 내놓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경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형식화를 해야만 한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모른다.

58. 내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는 것이 내게는 늘 가장 큰 도전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게 될까 봐 항상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일찍이 수리 논리를 접했기 때문에 기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결국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시간을 할당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59. 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또한 말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율이 감소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잘못임을 보여 주는 몇 가지 정리theorems가 나왔다. 엘스터와 뢰머John Roemer 그리고 나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기저에 있는 경제학 모델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나는 이를 악물고 신고전파 경제학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이때,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월러스틴이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경제학과로 가서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그는 내게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경제학자들의 글을 점점 많이 읽었다. 요즘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정치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나는 정치학자들의 글보다 경제학자들의 글을 더 많이 읽고 있다. 최근에 내가 출간한 정치경제학 교재의 주요 논지는 경제학을 모르고서는 정치경제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0-61. 당신의 연구에서 통계는 어떤 역할을 하나? / 모든 연구는 통계로 마무리된다. 나는 역사를 충분히 공부하고, 몇몇 가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일단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가설들을 만든 이후에야 통계를 살펴본다.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아보기 위해 통계를 참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통계적 관찰 결과들을 아무런 내용도 없는 “데이터상의 점들”로만 간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발전>에서 130개나 되는 국가들을 연구했지만, 지금도 나는 이 나라들 가운데 1백여 개국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역사를 30분은 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통계를 이용하기 전에 그곳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사용하는 데이터, 특히 정치 관련 데이터에 부주의한 편이다. 나는 데이터에 관한 한 결벽주의자다.

63-64. 내가 아는 한, 내 방법은 대부분 베버적인 의미에서 이해Verstehen의 방법이다. 주인공의 관점에서 선택의 구조를 보려고 했다. 내가 쓴 것에 상당 부분 서사적 요소가 들어 있었다.

65. 내 개인사와 관련된 다양한 이유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멕시코, 스페인, 프랑스, 폴란드, 한국, 케냐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이 나라들을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방문하며, 때에 따라 더 자주 가기도 한다. 또한 관련 글들을 체계적으로 읽는다. 그리고 그 나라에 본인이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보내 주는 제자들이 있다.

66. 외국어를 상당히 잘 하는 것 같다. / 폴란드는 모국어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유창하게 읽고 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로맨스어 계통이나 슬라브어 계통의 언어를 구사하고, 다양한 언어로 된 소설을 읽는다. 최근에는 포르투갈어로 된 소설을 다 읽었다.

68. 시카고 대학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발생했다. 개인적 친구이자 지적 대화 상대였던 일군의 사람들이 한데 모이게 된 것이다. 이 모임은 ‘윤리, 합리성, 사회 센터’Center for Ethics, Rationality, and Society라는 연구소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윤리’는 하딘, ‘합리성’은 엘스터, 그리고 ‘사회’는 내가 담당했다. 그 외에 홈스와 마넹, 파스퀴노 등이 이 모임에 들어왔다. 이 모임의 구성원 대부분이 현재는 뉴욕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가을이 되면 매주 월요일 페레존John Ferejohn의 주관으로 모임을 갖는다.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저녁 식사를 한다. 이 모임이 진짜 내 지적 생활의 중심이다. 오랫동안 만나 왔기 때문에 아마도 어느 정도 지겨울 때도 됐지만, 여전히 재미있고 자극이 된다.

69. 내 아내는 파리에 있는 OECD를 다녔기 때문에 나는 14년 동안 시카고와 파리를 오가야 했다. 하지만 아내가 뉴욕에 있는 유엔에 일자리를 구하면서, 우리가 한 도시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69. 모두가 시카고를 떠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곳을 정말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좋은 시절이었다. 진짜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구나 학장 사무실로 가서 “이보게, 내가 이 프로젝트를 5년째 해오고 있는데, 몸도 좀 아프고 마음도 지쳤네. 거의 끝마쳐 가기는 하는데, 좀 쉬어야겠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학장은 그냥 “휴가 사유서나 세 장 정도로 적어서 주게”라고 했다. 그러면 쉴 수 있었다. 대학 당국에서는 기꺼이 지적인 목표를 돈보다 앞세웠다. 시카고 대학은 독특한 기관이었다. 누구나 그곳을 경험해 본다면 홀딱 반해서는 낭만적인 감정을 가질 만한 그런 곳이었다.

70-71. 분석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룹에도 열심히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그룹이 다루는 기본 의제는 무엇인가? / 현대 사회과학의 방법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히 검토해 보려 했다. 다른 이론에 적용하는 것과 같은 추론과 증거의 기준을 적용했을 때,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나 그리고 그것의 어떤 부분이 견뎌 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생각이었다.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는 그 이론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자신만의 내재적 방법과 방법론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그 방식을 거부하며 “마르크스주의도 다른 이론과 같은 방식으로 평가해 봐야 한다. 그것이 논리 정연한지 아닌지, 참인지 거짓인지 말이다”라고 주장했다. 나는 분석 마르크스주의 그룹에 1979년인가 1980년인가에 들어갔다 - 내 기억으론 이 그룹이 활동을 시작한 두 번째 해였던 것 같다. 엘스터와 함께 나는 1990년대 중반 이 그룹을 떠날 때까지 참여했다. 즐거운 모임이었고 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 프로그램을 완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그룹을 그만두었다. 우리는 중요한 연구 성과물을 지속적으로 출판했는데, 뢰머의 <분석 마르크스주의>Analytical Marxism(Roemer 1986)와 엘스터의 <마르크스 이해하기>Making Sense of Marx(1985), 나의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코언의 <칼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에 대한 변론>Karl Marx’s Theory of History: A Defense(Cohen 1978), 뢰머의 <착취와 계급의 일반 이론>A General Theory of the Exploitation and Class(Roemer 1982)이 그것이다. 우리는 결국 마르크스주의에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며, 배울 것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주로 지적인 이유에서 분석 마르크스주의 그룹을 떠나게 되었다.

71-72. 1978년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국제사회학회의 세계 회의가 열렸다. 발전을 주제로 한 대규모 원탁회의에서 나는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최후의 단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라는 레닌의 유명한 주장(Lenin 1939)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나는 카우츠키를 지지하면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다른 나라를 침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침투가 성공하면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재생산하게 되고, 따라서 제국주의는 더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토론자였던 러시아인 참석자가 완전히 흥분해서 이렇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라고 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최후 단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는 러시아어로 “당신이 감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라고 했다. 그러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한 폴란드인 친구가 그를 데려가서 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결국, 그 러시아인은 나를 ‘저들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니까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이었다. 내게 이런 상황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마르크스주의의 완성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를, 노동계급을 배신한 관료주의 체제라고 보았다. 나는 결코 공산주의에 공감해본 적이 없었다. 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1960년대 중반 폴란드에서, 노동자를 억압하는 공산당을 비판하는 연구 집단에 참여했다가 고초를 겪은 바 있다. 반대로, 1990년대 초에 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신고전파 경제학의 적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신고전파 경제학은 신자유주의를 뒷받침(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는 그 기원(원전)으로 되돌아가, 이데올로기를 이론과 구별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반공주의자인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73. 무엇보다도, 내 공동 연구자들은 대부분 대학원 제자들이었다. 나는 가르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내 인생에서 주요 대화 상대는 대학원 제자들이다. 난 항상, 내 강의를 듣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와 비슷한 분야나, 내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학생들과 함께 협력하면서 일조의 자연과학 실험실을 운영했다.

74. 기본적으로 공동 연구자로는 개인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으면서, 똑똑하고 성실하고, 학문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을 찾아야 한다. 함께 작업하는 사람이 학문적으로 훈련되지 않고,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한다면, 누구든 미쳐 버릴 것이다.

75. 나는 학생들을 확실히 ‘훈련’시킨다. 대학원생들은 체계적 프로그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나와 공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묻는다. 그리고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는 “그것을 하려면 이러이러한 것들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해준다. 요즘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어느 정도의 철학과 어느 정도의 경제학, 그리고 꽤 많은 통계학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내 학생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는다.

76. 나는 학부 수업을 싫어하는데, 학생들에게 동기부여도 해야 하고(이들에게는 평생 배우는 일보다 더 좋아하는 관심사가 있다),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원생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즐겁다.

82. 폴란드에는, “숲이 불타고 있는데 장미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83. 내가 학생들에게 게임이론 강의를 듣도록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며, 누구나 다룰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 핵심이지 모든 환경에 게임이론을 적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84. 게임이론은 좋은 사회학과 함께할 때 작동한다. 즉, 상호 의존적인 어떤 구조에서 행위자가 차지하는 위치로부터 그의 동기를 합리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을 때 작동한다.

85-86. 사례연구를 할 때는 그 사례가 다른 사례들의 광범위한 맥락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사례연구를 하기 전에 회귀분석을 해봐라. 그러고 나서는 선 위에 있는 사례들을 먼저 살펴봐라. 그런 후에 가외치들outliers을 봐라. 왜냐하면 이 가외치는 특수한 조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1900년에 아르헨티나는 세계 10대 선진국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침체되어 있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기이한 나라다. 이게 다 무슨 뜻일까? 아르헨티나의 사례로 이론화를 하면 보편성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87. 뢰머가 <분석 마르크스주의>의 서론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거시적 수준에서 규칙성을 발견하고자 하지만, 설명은 미시적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군가는 거시적 상태를 초래하는 그 무엇인가를 다루어야 한다. 거시 비교 역사 사회학은 이런 인과기제를 제공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89. 미국 비교정치학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저명한 비교정치학자들 가운데 다수가 외국인이거나 외국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이치, 오도넬, 빈더, 린츠, 졸버그 등 수도 없이 많다.

91. 확실히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다른 일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말이다. 그저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뚜렷한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연구가 이 의견에 따라 이루어졌다. 나는 내 자신이 정치적 논쟁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며, 참여의 질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는 분명 내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93.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대학원생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 나는 “넓게 생각하고”, “위험을 감수하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이미 좋은 대학에서 안정된 자리에 있는 내가 하는 이 조언은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그래서 조언은 하지 않겠다. 선택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했고, 그 결정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 1:51 pm: bluemosesErudition

얼마 전 라만차 지역의, 그 이름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느 마을에, 창 걸이의 창, 오래된 방패와 비쩍 마른 말 그리고 사냥개 한 마리를 지닌 신사가 살았다. 그는 양고기보다는 쇠고기를 좋아했고, 거의 매일 밤 샐러드를 먹었으며, 토요일에는 생선 찌꺼기를, 금요일에는 렌틸콩을, 일요일에는 비둘기 고기와 다른 뭔가를 먹었는데, 식비로 그의 소득 4분의 3을 지출했다. 나머지 소득은 축제 때 착용할 고운 천의 더블릿과 벨벳 반바지와 신발에 들였고, 평일에는 최고의 수제품 복장으로 한껏 멋을 냈다.

In a village of La Mancha, the name of which I have no desire to call to mind, there lived not long since one of those gentleman that keep a lance in the lance-rack, an old buckler, a lean hack, and a greyhound for coursing. An olla of rather more beef than mutton, a salad on most nights, scraps on Saturdays, lentils on Fridays, and a pigeon or so extra on Sundays, made away with three-quarters of his income. The rest of it went in a doublet of fine cloth and velvet breeches and shoes to match for holiday, while on week-days he made a brave figure in his best homespun. _ Migel de Cervantes(1547~1616)

: 1:18 pm: bluemosesErudition

0. 인구 절벽, 재정 절벽의 시대. 살아가는 힘, 확실한 학력. 미래 사회를 살아갈 역량. “정말 교육을 바꾸려는 것일까?”

1. 이종태 소장(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21세기 교육연구소)은 “교육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을 가로막는 교육 이해관계자들이 여론을 왜곡시키고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2. “몇몇 대학들과 사교육업체에서는 변별력 저하를 우려하며 수능 전면 절대평가를 반대한다. 더 나아가 학생부전형의 불공정성을 비판하며 마찬가지로 수능 전면 절대평가를 반대한다. 수시를 축소하고 정시를 확대하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절충안으로서, 수능 전 영역 절대평가가 아니라, 현재 절대평가를 적용하는 한국사, 영어에 이어 2021학년도에 절대평가 영역을 하나 더 늘려보자는 주장을 한다. 절대평가와 상대평가가 혼합된 현 수능의 점수체계는 무엇을 평가하겠다는 철학과 개념이 사라진,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지는 둘 밖에 없다. 전면 상대평가, 아니면 전면 절대평가,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선택지는 무의미하며, 절대평가를 다른 한 영역으로 부분적으로 확대하자는 주장은 미봉책도 되지 못한다. 부분 확대 주장은 대입전형의 안정화도 내실화도 아닌 수능 변별력 지키기일 뿐이다. “second chance”라는 명목으로 뒤늦게 철든 학생, 재수생, 검정고시생들을 거론하는 것도 평소의 모습으로 보건대 낯선 풍경이다. … 수능이 전면 절대평가로 전환되어야 문·이과통합을 지향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이 교육 현장에서 유의미해지고, 고교학점제와 새로운 고교 유형 체계도 필요성이 확산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수능 전면 절대평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일반) 학교 교육을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다. 새로운 (일반) 학교 교육이 경제적 여건과 지역 환경에 따른 학력 격차를 줄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키우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는 일이 수능 절대평가 전환이다. (중략) 일본 정부는 이미 2015년부터 10년 계획을 세워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입시 그리고 대학교육을 새롭게 설계하고 집행하고 있는 중이다.”

: 12:41 pm: bluemosesErudition

1. 계륵. 닭의 갈빗대. 후한서 <양수전>에서 유래한다.

2. 위나라 승상 조조는 촉나라 군주 유비와 한중을 놓고 겨루고 있었다. 늦은 밤 암호를 정하기 위해 찾아온 하후돈(夏侯惇)에게 조조는 ‘계륵’이라고만 하였다. 영문을 알지 못했다. 이때 양수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짐을 꾸렸다. “닭의 갈빗대는 먹을만한 것이 없지만 그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부위다. 한중을 버리기 아깝지만 대단한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조조는 군율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양수를 참형에 처하였다.

3. “양수가 한 수 모자랐어. 남보다 빼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남보다 잘 아는 것을 입 안에 삼키고 있기란 더욱 어려운 일인 법. 양수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입을 열지도 않았을 것이고,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제갈량)

: 11:31 am: bluemosesErudition

시바타 도요, 92세 등단

: 11:18 am: bluemosesErudition

최영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