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ly, 2018

July 14, 2018: 6:19 pm: bluemosesErudition

최종렬,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분석”, 한국사회학 제51집 제1호, 2017.2, 243-293. “이 글은 김홍중의 생존주의 청년 세대 테제를 ‘복학왕’으로 대표되는 지방대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경험적으로 따져본다. 먼저 김홍중이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는 푸코의 (탈)구조주의적 입장을 보완하기 위해 자기계발 담론을 공적 상징체계로 정의하고 이를 활용하는 행위자의 능력을 강조하는 문화화용론을 새로운 방법론으로 도입한다. 이어 6명의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분석을 통해 그들이 활용하는 공적 상징체계를 가치, 규범, 목표 차원에서 해석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김홍중의 생존주의 청년 세대의 마음의 코드와 견주어 본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지방대생에게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고, 이를 자기계발 담론이라는 공적 상징체계를 활용하는 지방대생의 독특한 집단 스타일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5:49 pm: bluemosesErudition

“한국 정부는 지난달 이란 다야니 가문이 제기한 730억원 규모 ISD 재판에서 패소했다. 엘리엇뿐 아니라 미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털 역시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정부에 1억7500만 달러 규모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ISD 중재의향서를 제출한 상태다. 엘리엇의 피해보상 청구금액(8650억원)에 더해 최소 3년이 걸리는 ISD 재판 기간 등을 감안해 법률 비용까지 계산하면 1조원 가까운 국세가 엘리엇과의 ISD에 투입될 수 있다.”

: 1:05 pm: bluemosesErudition

노송나무의 여러 이름. 편백(扁柏), 회목(檜木), 히노키(ひのき)

: 1:03 pm: bluemosesErudition

“편백나무는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다.”(영화 <그 해 여름>)

July 12, 2018: 11:53 am: bluemosesErudition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신임 원장에 김수영(53)씨가 임명됐다. 임기는 2021년 7월 10일까지 3년이다. 김 신임 원장은 독일 콘스탄츠대에서 플라톤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2년부터 문학과지성사에 재직하면서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 밖에 한국출판인회의 정책위원장, 로도스출판사 대표,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도 활동했다. 출판진흥원은 출판사를 지원하고 국민에게 독서를 권장하는 정책을 총괄하는 예산 100억원 규모의 공공기관으로, 2012년 7월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설립됐다. 예산은 적은 편이지만, 정부의 각종 출판지원 사업을 하고 있어 출판계에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지난 정부 때 출판사 지원 사업인 ‘세종도서’ 추진 과정에서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출판사의 도서를 배제하고 회의록을 조작한 사실 등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이에 따라 낙하산 인사로 내려왔던 전임 이기성 원장이 지난해 11월 물러나면서 8개월 동안 공석이었다. 이후 출판계가 공모 절차에서 한철희 돌베개 대표와 김인호 바다출판사 대표를 추천했지만,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출판사 경영권을 정리하도록 하자 두 후보가 모두 사퇴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 12:53 am: bluemosesErudition

넬슨 만델라, 손주의 이름, 희망

July 11, 2018: 11:43 pm: bluemosesErudition

황인찬 시인이 LGBT에 속한다는 말을 들었다.

: 11:39 pm: bluemosesErudition

헤이그라운드를 운영하는 루트임팩트 대표 정경선

July 10, 2018: 2:45 pm: bluemosesErudition

“모든 것이 생경하고 새삼스러운 태도가 시를 쓰기 좋은 태도”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인가요?

그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공감을 한다는 건 ‘난 이걸 알아’라는 태도잖아요. 그러면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요. 어떤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시의 자리는 공감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내려면 ‘이게 내가 알던 건가? 내가 알던 게 이게 맞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생경함의 자리, 놀라움의 자리로 가야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좋은 지점이라는 생각은 굳어져 온지 오래돼서, 한편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요. 저 역시 그런 이상함과 생경함에 끌려서 시를 시작하게 됐으니까, 끊임없이 공감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게 제가 시를 만들어내는 방식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쓴 시가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라고 생각되는 건 아니기도 해요(웃음).

시를 쓸 때 독자에게 전할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메시지를 던지는 건 정말 의미가 없어요. 아주 일시적이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메시지를 갖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말이, 오히려 그 말을 선택하는 순간 훼손돼요. 손상되고 아무것도 아닌 덜 떨어진 종류의 말로 메시지가 갈 수밖에 없어요. 말하자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하고 짚어서 전달하는 게 아니고, 그물을 더 넓게 펼쳐서 던지는 거예요. 그러는 편이 원래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 생각, 진정성을 덜 훼손시켜요. 창작이란 깎아나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훼손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면 메시지를 깎지 말고 구조를 깎아야 되는 거예요. 구조가 알아서 메시지를 더 크게 만들거나, 더 다양하게 만들거나, 더 힘 있는 형태로 만들어줄 테니까요.

“술술 읽히되 뭔지는 금방 안 들키는 시를 쓰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시를 쓸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읽었을 때 바로 쓱 읽혀야 된다는 거예요. 시의 층위가 미로라고 생각하면 출구가 있어 보이고, 암호가 있어 보이면 암호를 푸는 순간 다 알았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 순간 생각이 멈춰요. 그래서 저는 한 번에 읽히는 시를 쓰는 게 좋아요. 시가 가진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텍스트 자체는 쉽게 읽히되 그것이 무엇인지는 들키지 않게 만들고 싶은 거죠. 그게 제가 시를 쓰면서 갖고 있는 태도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 10:51 am: bluemosesErudition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중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먼 기억을 중심에 두고/둥글둥글 살아간다는 것//무심히 젖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나이」 전문)

고향 마을에 들어 내가 뛰어다니던 논두렁을 바라보니 논두렁 물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사내의 몸에서 나온 소년이 논두렁을 따라 달려나갔다 뛰어가던 소년이 잠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논두렁 멀리 멀어져간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내는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논 거울」 전문)

날이 맑고 하늘이 높아 빨래를 해 널었다/바쁠 일이 없어 찔레꽃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텃밭 상추를 뜯어 노모가 싸준 된장에 싸 먹었다/구절초밭 풀을 매다가 오동나무 아래 들어 쉬었다/종연이양반이 염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가고 있었다/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또 하루」 전문)

한때 대학교수이기도 했던 시인은 삼년 만에 홀연 사직서를 내고 지금은 ‘자두나무 정류장’과 ‘이팝나무 우체국’이 있는 외딴 강마을에서 ‘그냥저냥’ ‘심심하게’ 살아간다. 삶의 기척에 귀 기울이며 “먼 기억을 중심에 두고/둥글둥글 살아”(「나이」)가는 그의 시를 읽다보면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착해빠진 시인이 있다는 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는 안도현 시인의 말이 꼭 들어맞는다. 천생 시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과 더없이 순정한 마음으로 “여전히 새로운 시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를 “시인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박준)

내 눈물이 아닌 다른 눈물이 내게 와서 머물다 갈 때가 있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안에 들어 울다 갈 때가 있어(「눈물」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