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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8, 2017: 1:13 pm: bluemosesErudition

(21-22) 우리는 뿌리는 형이상학이고, 줄기는 자연학이며, 가지들은 의학, 역학, 도덕학이라는 세 가지 원리로 다른 학문들을 환원시키는 나무로 철학을 비유하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이미지를 잘 알고 있다. … 데카르트의 나뭇가지들은 줄기부터 잘려져 나갔기에 사람들은 뿌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잊어버렸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분리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하이데거와 더불어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 La science ne pense pas”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27-28) 4만 쪽 이상을 쉬지 않고 채워 나간 후설의 당혹스러울 정도의 엄청난 생산력은 철학사가들 스스로가 목격하게 된 미묘한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 상황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후설은 그 자신이 나아간 자리가 어디이며 실질적으로 탐구한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전에 이미, 그의 단호한 발걸음과 방법이 담고 있는 탁월한 성질로 인해 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을 사로잡았고 또한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후설 자신이 가장 심각한 내적 의심과 불확실성이라는 위기를 겪고 있던 와중에, 각자 자신의 기질과 문제를 안고서 후설과는 다른 길에 서서 경주를 감행한 일군의 제자들이 존재했다. 이후에 후설의 진화단계에 있어, 일례로 하이데거와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탐구를 초래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초월적 현상학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자신의 스승의 빛을 퇴색하게 만들었고, 그 스승을 철학사에만 머무는 과거의 유물로 곧장 변형시켜 버렸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선구자들의 운명이다. 칸트, 베르그손, 후설은 심지어 자기들의 최후의 저작이 출간되기 전에, 이미 ‘역사적’인 ‘낡은’ 존재가 되었다. 이들의 후예들이 선배들이 선 무대의 막을 내려버린 것이다.

(29) 80~90년대를 거치면서 미셸 앙리(Michel Henry)와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 등의 노력으로 현상학은 후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다시금 전진하게 된다. 즉, 후설의 재해석, 후설의 재생이 이루어진 것이다.

(35-36) 현상학자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판단하고, 확증하고, 꿈을 꾸고, 살아갈 때 등에 우리가 정신에서 가지는 의미작용은 무엇인가? 따라서 현상학은 결단코 외적 사실들 내지 내적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반대로 현상학은 잠정적으로 경험에 침묵을 고하고, 그 주의를 오로지 단순하게 의식 안에서의 현실성, 요컨대 후설이 이념적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의식을 통하여, 그리고 의식 안에서 지향되는 한에서의 대상으로 그 주의를 돌리기 위해 대상적 실재성이나 실재적 내용의 문제를 제쳐두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순전한 주관적 표상들(또는 심리학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나 이념적 현실성(의식에 대해 주어진 것을 부당하게 현실화하거나 실체화하는 것)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되고, 바로 ‘현상들’만을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상 대 사물 자체라는 칸트적 대립을 잊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일 현상학이 실재 그 자체를 괄호로 묶어 버리는 것이라면, 현상은 우리에게 있어서 제2의 질서에 속하는 실재성으로서의 사물 자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현상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selbstgebung.

(38-39) 현상학적 방법은, 의식을 통해서 지향된 본질에 관한 기술적 분석을 전유하고, 자신의 방법을 철저화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발견하고 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이며, 재차 말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는 객관주의적(또는 자연주의적)이지 않고, 형이상학적이지도 않으며, 더 나아가 심리학주의적이거나 주관주의적인 것이 될 수 없는 입장으로서의 철학적 차원에 진입하게 된다. 이에 초월적 영역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열리게 된다. 의식에 대한 비심리학적 분석으로부터, 후설은 비심리학적 의식, 초월적 의식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간다. 이 환원의 과정(마음의 자연적 경향에 대립하여 진행되는)을 통해서, 그리고 그 철저한 고행을 통해서, 전적인 몰입을 통해서, 후설은 심리학 및 심리학주의의 음흉한 유혹을 피해 간다. 이때 현상학은 비로소 초월철학이 된다.

(39-40) 초월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이 새로운 발걸음이 후설을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끌어 주는가? 만일 환원이 ‘현상학적’이라고 일컬어진다면, 이것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더 높은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환원은 현상으로서의 세계(더 이상 단순히 세계 안에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닌)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는 그 사실이나 현존의 실재성(이것은 괄호로 묶인다)에서가 아닌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 안에서 나타나는 사실과 관계한다. 이제 ‘환원된 것’ - 오히려 이러저러한 지식의 영역 속에 있는 사실이나 실재적인 것 - 은 모든 경험적 판단, 우리가 자연적 태도로 세계에 대해 나타내는 경험적 판단, 이성적이고 그 자체로 과학적인 판단의 세계 및 그 총체이다. 환원한다는 것은 의심을 제거하거나 또는 의심을 제시하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의심을 통해서 하나씩 제거시킨 세계를 복원하기 위해서 실행한 회의론적 단계와 같은 것도 후설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괄호 치기, 제로 지수가 세계에 지정된다는 것은, 후설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고, 데카르트처럼 세계를 잠시나마 비존재 속으로 던져 넣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환원은 의식과 세계의 본질적인 지향적 연결, 자연적 태도 속에서는 감춰진 채로 존재하는 관계를 본질적이면서도 원초적인 과업을 위해 존재한다. 후설에게 세계는 환원 이후에 남겨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로지 사실에 대한 모든 지식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이고 일차적인 항, 그 의미의 지지대 내지는 정초로서의 주체(초월적 자아)에 준거하게 된다는 점을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환원은 동시다발적으로 나(코기토에서의 자기의식에서의) 필증적 명증성과 이 초월적 의식을 통한 지향적 세계-현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둘의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의심불가능한 연결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초월적인 의식의 지향성).

(40-41) 이 코기토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의심가능한 세계를 ‘지탱시키는’ 존재에 대한, 사유하는 것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이 아니며, 일종의 원초적 사실 내지 자아에 대한 내적 경험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여전히 세계의 차원, 심리학적 인식과 사실에 대한 자연적 인식의 차원에 머무르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자연적 세계 바깥에 있는 자로 파악하는 것이며,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명증성에 속하는 초월적 주체성으로, 다시 말해 자기를 모든 의미작용의 기원으로, 세계의 의미로 파악하는것이다. … 세계가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세계라는 존재란 더 이상 현존이나 현존의 실재성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존재 의미이며, 이 세계의 의미가 코기토에 의해 지향되는 사유대상cogitaum이라는 사실 속에 귀속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환원이라는 것은, 코기토만이 아니라 에고-코기토-코기타움, 즉 세계에 대한 의식, 세계에 대한 의미를 구성하는 의식을 나타낸다. 또한 이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는, “하나의 현존이 아니라 단순한 현상”이자 의미다. 이제 실재성의 총체를 분할하는 두 영역을 상상하지 말자. 형이상학적 배후-세계처럼 간주될 수 있는 자연적 세계 및 초월적 영역은, 그 모든 존재가 이차적 자연으로 기술되고, 파악되며, 인식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오직 하나의 세계가 존재할 뿐이며 초월적인 것이 오히려 나에게 의식의 지향성을 구성하기 위한 또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게 된다.

(41) 지향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철학적 문제의 전통적 여건들을 변형시켰는지를 세부적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겠다. 프란츠 브렌타노에게서, 지향성 개념은 여전히 심리학적 경향을 지닌 것이었다. 즉,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은 모든 심리적 현상의 특징이었다. 후설에게 지향성 개념은 직접적으로 인식론적인, 그 다음으로는 초월적인 경향을 지니며, 심지어는 존재론적인 경향마저 지니는 것이다. 이 지향성 개념은 주체와 대상, 사유와 존재 간의 새로운 관계를 특징짓고, 이 둘을 분리시킬 수 없는 본질적인 연결을 특징짓는데, 이 개념이 없이는 의식이나 세계도 파악될 수가 없다. 의식의 지향성은 ‘모든 의식이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라고 규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45-46) 결과적으로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의 이중적 과제를 보게 된다. 한편으로 현상학적 환원은 다시금 되살아나는 심리학적 의식의 유혹을 일정하게 제쳐두고, 모든 의미 탐구를 위해 치유할 수 없는 우연성과 다양한 파괴적 상대주의를 넘어서게 해주며, 또한 철저한 정초를 갖는 필증적 명증성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현상학적 환원은 모든 소박한 실재론과 자연주의로부터 우리를 지켜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향성도 이중의 이점을 갖는다. 이것은 세계를 향해, 세계 안에 의식을 투사함으로써 관념론을 파열시키고, 우연적 체험과 그 체험의 필연적 의미 사이의 결합을 보증해 준다.

(104) 현상학은 세계의 체계나 세계관이라기보다는 의식의 모험이다. … 현상학은 괄호 친 사실과 심리학적으로 주어진 것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며, 궁극적으로 체험된 세계를 복원하는 것과 같다.

(108-109)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후설이다. 후설의 현상학의 핵심은 개념화되거나 서술되기 이전에 우리의 순수한 의식 속에서 체험되는 주어진 것으로 시선을 돌린 데 있다. 환원을 통한 지향성의 발견은 개념이나 판단으로 채색되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생한 현상들을 불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에 우리의 관점, 더 나아가서는 삶과 세계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현상학적 태도 전환이 우리에게 주는 신선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생생한 세계와의 대면 그 자체이다. 이 세계는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계산의 대상도 아니고, 판단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들의 보고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이전까지 견지했던 자연적인 일상 태도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신비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런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후설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세계 자체이자 근원적 세계이다. 다만 우리는 그런 세계를 일견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의 의미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후설의 사유에 입각해서 발견되는 현상의 세계를 기술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통찰들을 얻게 된다. 바로 이것이 현상학적 사유의 매력일 것이다.

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환원은 의식과 세계를 매개하는 지향성의 포착이고, 그 포착은 우리에게 생경한 본질을 선사한다.

: 11:58 am: bluemosesErudition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 3절)

: 11:51 am: bluemosesErudition

어딘가에서 발터 벤야민은 “모든 결정타는 왼손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왼손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예기치 못했던 그것. 저 팬시한 문장 기저의 맥락상 지칭의 대상은 ‘필사’로 여겨진다. 정독과 숙지의 힘.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가 원시림을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에서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필경사는 문자문화의 비할 바 없는 보증인이며, 필사, 즉 베껴쓰기는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_ 발터 벤야민(1928), <일방통행로>, 76~77쪽.

: 3:28 am: bluemosesEru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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