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my servant Caleb, because he has a different spirit and has followed me fully, I will bring into the land into which he went, and his descendants shall possess it.”(Numbers 14:24)
“But my servant Caleb, because he has a different spirit and has followed me fully, I will bring into the land into which he went, and his descendants shall possess it.”(Numbers 14:24)
“기원전 5세기 미론의 조각상인 ‘원반 던지는 사람’은 어떨까. … 영국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자신의 저서 ‘서양미술사’에서 ‘원반 던지는 사람’은 실제 동작을 표현한 게 아니라 예술작품이며 이 자세를 따라 연습했던 현대의 운동선수들은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 사정>에 의하면 “영어의 소사이어티(society)에 해당하는 번역어 ‘사회’가 자리잡아가는 역정은 전형적이다. 1796년에 나온 최초의 네덜란드어-일어 사전에서 이 말은 ‘교제하다’ ‘모이다’라는 말로 옮겨졌다. 품사에 대한 사고가 불분명해 명사인 원어를 동사 형태로 번역한 것이다. 1814년 최초의 영어-일어 사전에서는 ‘반려’라고 옮겨졌다. 1862년 다른 영일 사전에서는 ‘나카마’(동료), ‘마지와리’(교제) 등으로 번역됐다. 1872년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번역하면서 원문의 소사이어티를 ‘세이후’(정부), ‘세조쿠’(세속), ‘나카마’(동료), ‘가이샤’(회사), ‘소타이진’(총체인) 따위로 옮겼다. 처음으로 사회라는 말이 나온 것은 1876년이었다. 그해 근대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학문의 권유>에서 ‘사회’라는 새 조합어를 썼고, 이후 점차 이 말은 소사이어티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어로 받아들여졌다. 번역어가 이런 굴곡을 겪은 것은 일본 사회에 소사이어티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소사이어티란 궁극적으로 개인을 단위로 하는 인간관계의 집합인데, 일본 전통사회에서 그런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런 말도 없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낯선 한자어의 사용이 새로운 ‘효과’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어려워 보이는 한자에는 잘은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독자들이 받아주게 된 것”이다. 지은이는 이 효과를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 곧 작은 보석함은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이다. 이 효과 때문에 사람들은 새 번역어를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어려운 한자말 대신 쉬운 일본 고유어를 번역어로 쓰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일례로, 그는 개인을 뜻하는 ‘인디비듀얼’을 ‘사람’으로 번역했지만, 결국은 ‘개인’에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카세트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말뜻으로 깊이 물든 단어로는 낯선 외국어를 표현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말을 찾게 됐고, 그 결과 뜻이 결핍된 말, 즉 기의는 희박하고 기표는 뚜렷한 말이 조탁되었다. “카세트 효과는 말뜻의 결핍 탓에 숱한 남용과 오용의 빌미를 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근대’라는 말은 ‘가까운 시대’를 뜻하는 표면적 의미말고도 서로 충돌하는 심층 의미를 한꺼번에 얻었다. 그리하여 1910년대에 ‘근대’는 “뭔가 매우 위대한, 새로운 것”이었던 반면에, 1940년대에 근대는 “혼란 그 자체이며 지옥이라 해도 좋을” 시대로 통했다. 말의 오용과 남용은 ‘자유’라는 말의 경우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옛 한자말에서 빌려온 자유는 본디 ‘제 마음대로’라는 뜻을 지녔던 탓에, ‘프리덤’이나 ‘리버티’의 번역어로 쓰임으로써 수많은 혼동을 낳았다. 제 멋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오해한 것이다.”
* 윤리의 개념과 실체를 sittlichkeit가 아닌 倫理로 이해하려 들면, 위에 거론된 자유의 전철을 밟게 된다. 자유란 모름지기 (원)동인이 아닌 파생(태) 아닌가. 기의를 담은 기표 그 자체에서 뜻을 추정하면, 얄궂게도 history를 his+story라며 허구의 섭리에 감탄하고 만다.
강정 <처형극장>,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황병승 <여장남장 시코쿠> 등은 인/과의 간극을 어찌 다루는가. 이른바 시적 허용으로 치부하고 방치하는가. 문장과 문장 사이를 벌려 혼돈을 구겨 넣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남겨진 아이들의 새어 나오는 눈물이다.
誰も知らない 2004, そして父になる 2013, 海街diary 2015, e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