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rch 29th, 2017

March 29, 2017: 12:30 pm: bluemosesErudition

“사실 애니메이터가 지금도 대중적인 직업은 아니잖아요. 제가 일을 시작했던 30년 전엔 정말로 생소한 업(業)이었죠. 그런데도 일을 하면서 불안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아, 이게 내가 평생 하고 살 내 업(業)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서 불안은커녕 정말 행복했어요. 3년 정도 국내에서 일하다가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이 더 좋은 곳으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 해외 스튜디오로 이직 준비를 했어요. 1989년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로 건너가 6년 넘게 일했죠. 그러던 중 스튜디오가 갑자기 문을 닫았어요. 당시가 1995년도였는데, 디즈니의 <뮬란>, 픽사의 <토이스토리>가 나오고 드림웍스가 막 생기기 시작했던 애니메이션 업계의 황금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은 없지만, 미국으로 건너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월트 디즈니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는데 웬걸? 제가 진짜 월트 디즈니로 입사하게 된 거예요. 어린 날, 제게 꿈과 희망의 세계였던 <피터팬>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터가 된 거죠!”

“미국의 월트 디즈니가 지금과 같은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일단 규모 면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경험의 양이 다른 데다 이것들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새로 들어온 아티스트들이 그것을 몸으로 체득해 보다 빨리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면이 있거든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은 뭐든 열심히 보고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점심시간에도 단체로 가까운 뮤지엄에 가거나 전시회를 보러 가죠. 일단 무엇이든 보고 관찰하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_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시즌2, 첫 번째 _ 애니메이터 김상진

: 12:15 pm: bluemosesErudition

(14) 김대중은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정책을 앞세운 첫 후보였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향토예비군 폐지 등이 대표적 예다. 박정희 캠프는 이에 맞서, 어이없데도,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주의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승만 정권 때는 물론이고, 5.16군사반란 이후 박정희가 윤보선과 맞붙은 두 번의 대선에서도 지역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윤보선 캠프가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던 1963년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사실상 호남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로 신승했다. 그러나 1971년 대선에서 공화당 의장 이효상이 들고나온 ‘신라 임금론’은 그 뒤 지금까지 한국 정치를 옥죄고 있는 영남패권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1971년 선거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영남패권주의가 고개를 쳐든 선거였다.

(41) 변화를 읽지 못하는 완고함이 게으름의 한 형태라면, 아무데서나 변화를 읽어내는 과민함도 게으름의 한 형태다. 둘 다,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 속 편한 환상으로 도피한다.

(70-71) 고종과 김일성을 놓고 누가 최악의 권력자였는지를 따지는 일이 힘든 것과 달리, ‘넘버 쓰리’는 쉽게 짚을 수 있다. 이승만이다. 하와이와 미국 본토를 오가며 강대국에 청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 가는 곳마다 불화를 일으켜 자신이 우두머리가 돼야만 직성이 풀렸던 사람, 해방 뒤 미국의 도움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한 사람, 그래서 민족분단의 문을 연 사람, 한국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남으로 줄행랑친 뒤 한강철교를 폭파해 서울 시민의 피난을 막은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서울에 있고 국군은 북진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낸 사람, 서울이 수복되자 한강을 못 건너고 인공 체제를 견딘 이들을 ‘잔류파’라 부르며 ‘부역자’로 몰아 단죄한 사람, 전쟁 발발 앞뒤로 제주도에서 거창에서 또다른 많은 곳에서 잔악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사람, 공식적으로 전향한 이른바 보도연맹원들을 죄다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사람, 제 정적이면 좌익이든 우익이든 사정없이 제거한 사람, 전쟁 중의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의 세가 불리하자 계엄령을 내리고 헌법을 고쳐 다시 대통령이 된 사람, 전쟁이 끝나자 오직 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중임 제한 철폐 개헌안을 발의해 국회 투표에서 한 표가 모자라자 ‘4사5입’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헌법을 고쳐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한 사람, 수도 서울의 수도를 제 호號 ‘우남’으로 바꾸고 싶어했던 사람, 독재와 부패와 부정선거에 맞선 전국적 시민항쟁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그제야 마지못해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내뺀 사람,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서울 탑골공원과 남산에 제 동상을 세우고 환화貨에 제 얼굴을 새긴 사람.

(95-96) 대한민국 국가의 법적 정치적 역사적 기초가 일본군국주의의 부정이었던 만큼, 일본 육사를 나와 일제 괴뢰군에 복무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큰 흠이다. 그러나 ‘친일분자 박정희’가 ‘폭군 박정희’를 압도하는 세평은 위험하다. ‘남로당원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일본제국주의를 떠받든 하급 장교였다는 사실, 건국을 전후해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 동지들을 밀고하고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 따위는, 그가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대한민국 전체를 병영으로 만든 죄에 비하면 크달 수 없다. 그의 친일행위, 그의 공산주의 활동, 그의 비열한 전향 따위에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길게는 18년, 짧게 잡아도 7년(유신체제 또는 제4공화국이라 불렸던 1972~1979년)간 그가 잔인하게 저지른 군사깡패 두목 짓에는 용서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는 민족반역자를 넘어선 인륜 파괴자였다. 정적 탄압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가 죽이고 싶을 만큼 김대중을 미워하고 불안해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인혁당 사건은 그가 저지른 가장 유명한 인간 백정질이지만, 그것이 널리 비난받았다는 점에서 얼마쯤 정의가 회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의 정적이나 비판자들만을 학대한 것이 아니다. 선거가 다가오거나 여론이 나빠질 때마다 터지곤 했던 간첩 사건 가운데는, 도무지 영문 모를 일이 많았다. 그 조작된 간첩 사건에 연루돼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망쳐버린 이들이 박정희 정적이나 비판자들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그야말로 ‘재수 없이’ 엮인 이른바 ‘컬래터럴collateral’이었다. … 그러고 보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장 큰 은인이다. 인간 도살자에게 순교자 이미지를 입혔으니 말이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것은 자유다. 세상에는 별 사람, 별별 취향이 다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무고하게 그의 손에 죽거나 다친 이들의 직계가족이 지금도 살아있으니 말이다. 꼭 그를 찬양하고 싶으면,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도록 물 담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있거나 고압 전류를 온몸에 흘려보라. 또는 인연이 닿는 조폭에게 부탁해 내장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얻어맞아보라. 그러고 나서 아는 검사나 판사에게 부탁해 괜히 10년이고 15년이고 감옥살이를 해보라. 그 감옥살이 동안 역사학자 한홍구의 글을 읽어보라. 그 뒤에도 사람들 앞에서 박정희를 찬양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병은 죄악이 아니고, 병증은 설득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

(274-275)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꼽히는 가우스는 일흔이 넘어서도 지적 활기가 졸아들지 않았다. 가우스의 인격에 대해서 이런저런 험담을 늘어놓는 수학사가들도, 그의 지적 능력이 10대 때나 만년에나 별 차이 없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예컨대 일흔 앞뒤인 영문학자 김우창 선생이나 유종호 선생의 글은 그들의 청장년기 때 글만큼이나, 어쩌면 그때보다 더 명료하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장년기를 통과하면서 학문적 전성기를 마친다는 사실도 엄연하다. 20세기 프랑스 지성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사르트르가 지적 정점에 이른 것은 30대 후반에 쓴 <존재와 무>에서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기록한 그의 만년은 추레한 노인의 일상으로 심란하다. 학자 사르트르만이 아니라 작가 사르트르도 그 전성기는 30대 때였다. 사실 예술적 상상력은 학문적 능력보다 쇠퇴과정이 빠른 것이 상례다. 첫 시집이 제 대표 시집이 되는 시인은 문학사에 지천이다. 심지어 도덕적 판단 능력이라는 것도, 나이와 함께 무져진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나이와 함께 더 벼려지는 것도 아니다.

_ 고종석, <정치의 무늬>, 알마, 2015.

: 11:06 am: bluemosesErudition

“한국어에서 일본어 혹은 일본어에서 한국어로의 사례와 같이 시스템에 학습을 시킨 적이 없었는데도 한국어-일본어 간의 번역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구글의 AI 개발 프로젝트 팀 「구글 브레인」의 마이크 슈스터는 블로그를 통해 밝혔다.

“우리가 파악하는 한,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국어 『제로 샷 번역』(번역할 때마다 영어가 개입되지 않는 번역 방법)을 제시한 첫 사례다.”

이 연구 논문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 AI가 예문이 제공되지 않았던 언어를 번역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니라 스스로 독자적인 「언어」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결과를 시각적으로 해석한 결과, 이들 모델은 번역 대상에 포함되는 모든 언어 쌍의 다언어 모델에 대해 인터링구아(interlingua)한 표현 형식을 학습한다는 점이 파악되었다”라고 논문은 밝힌다.

원래 인터링구아란 서유럽 주요 언어에 공통되는 어휘 등을 기초로 하여 간략화된 문법을 기반으로 삼아 구축된 국제 보조어를 말하는데, 기계 번역이 만들어내는 잠정적인 문장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번 논문에서 이 단어는 AI가 미지의 언어를 번역하는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네트워크 내부의 데이터를 3차원 표현해 보니 이 시스템이 일본어, 한국어, 영어라는 3가지 언어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언어 쌍 사이의 문장을 번역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연구팀은 밝혔다. 네트워크 내의 데이터를 사용함으로써 신경망 네트워크가 문장끼리 비교해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글의 의미를 “코드화하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네트워크에 인터링구아가 존재하고 있는 증거라고 해석했습니다”라고 연구팀은 말한다.

: 11:00 am: bluemosesErudition

How to use rhetoric to get what you want

: 10:56 am: bluemosesErudition

자중지란을 기대함

: 1:26 am: bluemosesErudition

(33-34) 경이감에서 기다림으로 움직여 가는 이 내러티브는 자기발명, 경쟁적 생산성, 자기만족을 특징으로 하는 내러티브와 상충된다. 이스라엘의 삶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세상의 길과 상충되는 삶이다. 자기발명 대신 경이감. 치열한 생산 경쟁 대신 해방.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결과를 위한 노동 대신 양식. 전제적 독점이나 자율적 염려 대신 언약의 대화. 자포자기적 복종이나 자율적 자기주장 대신 책임에 대한 보상. 소유 또는 무소유에 대한 절망 대신 기다림. 이 내러티브의 강조점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전승은 세상의 지배적 내러티브가 부적합하며 따라서 결코 진리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배적 내러티브가 부적합한 이유는, 이 세상의 삶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시는 야웨의 결정적 결의와 능력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50-51) 내가 사용하는 ‘상상력’이라는 단어는 우리 앞에 놓인 세계에 뿌리박지 않은 현실의 이미지들을 창조하고 말하는 능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기정사실 밖에서, 당연시되는 상자 밖에서 작동한다. 폴 리쾨르가 살폈듯, 예수의 비유들이야말로 그런 상상의 행위를 보여 주는 고전적 본보기다. 예수의 비유들을 보면 청중이 당연시하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 분이 생각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리쾨르는 그 비유들을 ‘한계 표현’(limit expressions)이라 부른다. 이는 낯익은 세계 바깥쪽으로 우리를 밀어내는 표현, 야웨와 청중 공동체 사이의 공간에 미지의 영토를 열어 주는 표현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전복적인 해방의 발언은, 계몽주의 합리성에 따라 예언서의 모든 내용에 ‘설명’을 달았던 우리의 비평 작업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언자적 발언은 토라의 통제 아래서 우리의 이성에 속박되지 않는 감정으로 분출된다. 예언자들은 구체적인 이미지들과 은유들을 사용하되 그것들을 계속 확대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달궈진 화덕’(호 7:4-7),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비둘기’(호 7:11), ‘입을 맞출 송아지’(호 13:2), ‘뒤집지 않은 전병’(호 7:8), ‘들포도를 맺은 포도나무’(사 5:2, 4), ‘터진 웅덩이’(렘 2:13), ‘절박한 창녀’(렘 4:30), ‘통의 한 방울 물’(사 40:15), ‘두려움을 모르는 벌레’(사 41:14) 등이 주는 긴급한 충격을 감지하게 한다.

(51-52) 예언자 특유의 메시지는 확실성이 아닌 가능성과 함께한다. 이 가능성을 통해 이제껏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을 불러일으키고, 충격을 전하고, 갖고 놀고, 탐구한다. 나는 이 예언자적 발언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의 위대한 투수 밥 깁슨의 빠른 볼과 유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투구에 대해 해설자들은 말하기를, ‘불쑥 나타나’, ‘움직이다가’, ‘솟아오르고’, ‘놀라게 하고’, ‘압도한다’고 한다. 예언자적 발언은 청중을 깜짝 놀라게 하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런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 실은 우리가 가장 꺼리는 곳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러한 자극은 세상을 참신한 각도에서 보게 하므로 직선적 산문으로는 실현 불가능했던 도전과 해방을 준다. 그 낯선 발언이 야웨께서 주신 것임을 고려한다면, 즉 야웨 자신의 이미지나 은유, 뉘앙스나 과장법, 모순 어법임을 유념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 1:17 am: bluemosesErudition

One of the major aims of the ISA World Congress of Sociology held in Montreal 1998, was to make a critical assessment of sociological heritage of the twentieth century. In this framework the ISA Congress Programme Committee carried on in 1997 an opinion survey in order to identify ten most influential books for sociologists. ISA members were asked to list five books published in the twentieth century which were most influential in their work as sociologists. 16% of ISA members (455 out of 2785) participated in the survey.

1. Weber, Max / Economy and Society (20.9)
2. Mills, Charles Wright / The Sociological Imagination (13.0)
3. Merton, Robert K. / Social Theory and Social Structure (11.4)
4. Weber, Max /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10.3)
5. Berger, P. L. and Luckmann, T. /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9.9)
6. Bourdieu, Pierre / Distinction: A Social Critique of the Judgment of Taste (9.5)
7. Elias, Norbert / The Civilizing Process (6.6)
8. Habermas, Jürgen /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6.4)
9. Parsons, Talcott / 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 (6.2)
10. Goffman, Erving /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 (5.5)

: 1:08 am: bluemosesErudition

레슬리 뉴비긴, 월터 브루그만 등이 즐겨 인용한 책. 현상학적 사회학의 고전을 읽는다.

: 12:38 am: bluemosesErudition

공허한 마음에, 생명의 진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