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5th, 2010

November 5, 2010: 3:02 am: bluemosesErudition

“하루키가 1990년대의 한 전형이라면 스노우캣은 2000년대의 한 전형이다. 스노우캣은 팻 매쓰니를 들으며 빈둥거리거나 영화를 보고 고양이 사진을 찍고 프랑스 여행을 떠나거나 하면서 시간을 흘려 보낸다. 김규항은 언젠가 스노우캣을 보고 좌파 이상으로 급진적이라고 했지만 사실 스노우캣은 하루키만큼이나 무력하고 비현실적이다.”(이정환, 2004)

: 2:04 am: bluemosesErudition

노승민(2010). EU 勞動法의 法源에 관한 硏究.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노동법학과 석사학위 논문.

* 겸사해서, 일선의 학위논문을 들춰본 뒤 나의 것을 살펴보았다. 유독 가독성이 미흡하다. 잔뜩 힘을 주고 쓴 탓이다.

: 1:58 am: bluemosesErudition

1. “일본 작가들의 말장난, 가벼움, 표피적인 것을 우리 작가들이 따라가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이 소설(<1Q84>)은 일본에서도 부실 공사라는 평을 받지 않았는가. 하루키는 감각적이고 가볍고 빨리 읽힌다. 사교가 가지고 있는 묘한 산물이다. 문학성은 거의 없다. 소모 문학이다. 나는 1권을 좀 읽다가 덮어버렸다.”

2. “삼성은 월급을 많이 주니까 좋은 회사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바보다. 파렴치한 기회주의·이기주의·개인주의적인 악랄한 궤변이다. 이를 깨부수고 가르쳐주려고 소설을 썼다. … 기업이 잘되어야 잘산다는 것은 망상·몽상·환상이다. 여기서 깨어나야 한다. 고뿔도 남 안 주는데 기업이 왜 당신에게 돈을 주겠는가?”

3.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도왔던 신부들이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좌천됐다. 종교까지 기업에 당하니 말이 되는가, 돈이 종교를 누르다니. 자본의 힘이 어디까지 가는 건지…. 당나라 때 사마천이 이미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돈이 나보다 만 배가 많으면 노예가 된다’라고.”

4. ”이 소설(<허수아비 춤>)로 사회를 정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게 안 되더라도 인간의 편에 서는 게 문학의 소임이다. 인간은 문학이 천착해야 하는 근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더 많은 작가가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길 바란다. 사실 사회현상에 대한 소설은 40대 젊은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젊은 작가들은 관심이 없다. 특히 취재에 관심이 없다. … 이것이 내 문제라고 생각하는 치열한 작가 의식이 없다. 작가가 민중의 논리적 증오를 가슴에 담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는 근본적으로 정신무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소설은 민중의 바닥에 있는 자본에 대한 증오를 담고 있다. 젊은 작가들이 사적인 것에 빠져 식상해져 있다. 각성해야 한다.”

* 건강한 자의식이란 것은, 역사 사회적 조망 안에서 공동선에 일조하고자 하는 부단한 지향을 뜻한다.

: 1:35 am: bluemosesErudition

1. 대중은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닿아오는 이슈가 아니면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비인간 행위자를 동원하여 특정 이슈를 매개로 다수의 대중이 결절된(punctualized)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라투르가 제시한 물정치(Ding-Politik) - 혹은 아감벤이 탐구하는 장치(dispositif) - 를 참고할 만하다.

2. 그렇다면 장치란 무엇인가? “이 [장치라는] 이름으로 제가 포착하고자 한 것은 담론, 제도, 건축상의 정비, 법규에 관한 결정, 법, 행정상의 조치, 과학적 언표, 철학적 도덕적 박애적 명제를 포함하는 확연히 이질적인 집합입니다. 요컨대 말해진 것이든 말해지지 않은 것이든, 이것이 장치의 요소들입니다. 장치 자체는 이런 요소들 사이에서 세워지는 네트워크입니다. … 장치란 (이른바) 일종의 형성체/형성물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것은 어떤 순간에 긴급함에 답하는 것을 주요 기능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장치의 지배적 기능은 전략적인 것입니다. … 저는 장치가 본성상 전략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에 의해 전제되는 것은 장치가 힘 관계에 대한 어떤 조작이며, 그런 힘 관계에 대한 합리적 계획적 개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입하는 까닭은 힘 관계를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거나 봉쇄하거나, 힘 관계를 안정시켜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장치는 늘 권력의 게임에 기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생겨나고 또 그것을 조건짓기도 하는 지식의 한 가지 또는 여러 제한과 연결됩니다. 지식의 여러 유형을 지탱하고, 또 그것에 의해 지탱되는 힘 관계의 전략들, 바로 이것이 장치입니다.” _ 푸코가 <성의 역사1: 앎의 의지>를 출간한 뒤 일군의 정신분석학자들과 나눈 대담(1977).

3. “이폴리트에 따르면 실정성이란 청년 헤겔이 역사적 요소에 부여한 이름이다. 그것은 외부의 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부과되어, 이른바 신앙이나 감정의 체계 속에 내면화된 규칙, 의례, 제도가 주는 모든 부담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푸코는 이 용어를 빌려와 (이것이 나중에 ‘장치’가 된다) 어떤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 입장을 취한 것이다. 푸코 자신의 가장 고유한 문제, 즉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개인과 역사적 요소와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여기서 역사적 요소란 무릇 권력관계가 구체화되는 장으로서의 여러 가지 제도, 주체화 과정, 규칙의 전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푸코가 생각하는 궁극의 목표는 헤겔에게서처럼 이 두 가지 요소를 화해시키는 데 있지 않다. 그렇다고 양자 사이의 충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실정성들(혹은 장치들)이 … 권력 ‘게임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Agamben, 2006[2010]: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