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의 손이 닿은 것이면 무엇이든 선하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타락한다.”
* 인격이 저질인 者를 온전히 섬길 수 있는가.
“조물주의 손이 닿은 것이면 무엇이든 선하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타락한다.”
* 인격이 저질인 者를 온전히 섬길 수 있는가.
Justice: Utility, Freedom, Virtue
0. “정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의 키워드는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이다. 샌델은 먼저 시장 중심 사회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라는 이유로 ‘행복 극대화’를 주장하는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이어서 정의를 자유와 연관짓는 이론을 살핀다. 자유를 통해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 내에서도 의견은 갈려서 자유방임주의(자유지상주의)와 공평주의가 서로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끝으로 정의가 미덕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보는 이론을 살펴보는데, 그러한 입장의 원조이자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리하여 샌델의 여정은 공리주의에서 시작하여 칸트의 도덕철학과 롤스의 정의론을 거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론으로 마무리된다. 중립적인 소개를 지향하지만, 이러한 여정 자체에 흔히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진 샌델 자신의 입장과 의도가 함축돼 있다.”
1. “가령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사자 우리에 던져놓고 구경꾼들이 환호하며 쾌감을 느낀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근거로 그런 행위를 비난할 수 있을까.” 또한 “2001년 독일의 한 남성이 먹힐 의향이 있는 사람을 찾는 광고를 낸 후 자원자 한 사람을 토막 살해하여 일부를 먹어치운 사건이 발생했다. 자유지상주의자는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식인 행위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칸트에게 도덕은 정언명령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만을 가리킨다. 특정한 이익이나 욕구는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를 계승하여 롤스는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평등원칙과 소득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그 이익이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쪽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차등원칙을 사회적 정의를 위한 기본원칙으로 제시한다.”
3. “칸트나 롤스는 무엇이 선이고 좋은 삶인지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중립을 지키는 국가’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자아’를 지지한다. 하지만 샌델이 보기에 그렇듯 선택의 자유만 확보하는 것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노력이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를 그가 더 옹호하는 이유다.”
“지난 주 버넹키 총재가 워싱턴 포스트에 이번 양적완화의 목적은 주가상승을 통한 자산효과(wealth effect)라고 기고해 사면초과네요. 결국 생산과 관련없는 또 하나의 버블일 뿐이라구요.”
1. “과연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캉). 그러니 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신경증)은 쉬운 일이고 그것에 삼켜지는 것(분열증)은 참혹한 일이다. 어렵고도 용기 있는 일은 그것과 대면하는 일이다. 그 심연에서 나의, 시스템의, 세계의 ‘진실’을 발굴해내는 일이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바라보겠지만(니체), 그 대치(對峙) 없이는 돌파도 없다. 그것이 시인과 소설가의 일이다(14쪽).” “그것은 어딘가 제 안의 심연을 대면하고 돌아온 오르페우스의 목소리처럼” 들릴 것이다(15쪽).
2.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말에 배반당하기 때문에 다른 말들을 찾아헤매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 실패를 한없이 곱씹는다. 그 치열함이 시인의 시적 발화를 독려한다. 한편 행동이 통제 불능이라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려는 자들이 소설가다. 소설가들은 법과 금기의 틀을 위협하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창조하고 그 순간이 요구하는 진실을 오래 되새긴다. 그것이 소설가의 서사 구성을 추동한다. 요컨대 문학의 근원적 물음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업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 말하자면 나의 진실에 부합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관건이다(14쪽).”
3. “비평가는 시집과 소설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질문으로 전환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설사 시집과 소설책이 더이상 제작되지 않고 팔리지 않는 22세기가 온다 해도 비평가는 실업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기어코 어디서든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그것을 비평할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믿지 않는 비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실업의 불안 때문이 아닐 것이다(16쪽).”
4. “가라타니가 전하는 바대로라면 한국의 비평가 김종철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문학을 했고,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 … 가라타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마치 1950년대 미국에서, 1980년대 일본에서, 1990년대의 한국에서, 갑자기 모든 문학이 일체히 윤리와 무관해지기로 결심하기라도 한 듯 말한다. 윤리가 정치의 하위 범주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17쪽).”
5. “그러나 미시 층위에서 문학이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면 ‘지푸라기 하나에서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햄릿> 4막 4장) 일을 늘 해왔다. 문학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 정치를 보족하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를 창안하는 윤리를 말해야 한다. … 다른 총체성이 있고 다른 윤리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근대문학이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근대문학의 ‘전부’라 믿었던 어떤 ‘부분’이 괴사(壞死)한 것이다.” “이 기형은 총체성의 파편이 아니라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일 것이다(18쪽).”
6. ”문제는 정치(의 윤리)를 위한 대답이 아니라 윤리(의 정치)를 위한 질문이다. … 발화의 종말과 행위의 파국에서 시와 소설은 시작된다. 그대 자신의 말을, 그대 자신의 행위를 하라. 이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라 부를 것이다. 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번째 표정이다. 몰락의 에티카다(19쪽).”
7.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Ethica)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이 이런 것이라서 그토록 아껴왔거니와, 시정의 의론(議論)들이 아무리 흉흉해도 나는 문학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6쪽).”
1. “4년 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집필 활동을 하면서 저녁에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어제도 새벽 4시까지 <선덕여왕>을 봤습니다. 한국 역사 드라마가 내셔널리즘과 마초이즘에 기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성을 생각하면서 보면 재미있습니다. 한정된 시공간에서 세계사를 상상하는 이야기의 형태인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계사를 상상하게 됩니다. … 한국 드라마가 최근 출간한 <세계사의 구조>에 많은 도움이 됐다”
2. “전쟁과 환경문제,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 등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역사적 관계를 집약하는 사항들을 과거 문학이 상상력으로 떠맡았지만 오늘날의 문학은 이것을 떠맡지 않고 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해야 할 정치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끝날 수 없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문학이 끝났다고 들었다.” 일본 문학이 한국에 많이 번역돼 인기를 끌고 있는 “그것이 문학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한국 신진 작가들 중 대다수가 문예창작과 출신인 상황이 “종언의 징후다. 문학이 배울 수 있는 기술이 돼버렸다.”
1. 전체가 부분을 결정한다. 미시적 사태의 거시적 원인. 게슈탈트.
2. 부분이 전체를 결정한다. 거시적 사태의 미시적 원인. 나비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