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9th, 2010

November 9, 2010: 1:05 pm: bluemosesErudition

전병욱 목사의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되새기며 자성한다.

: 1:04 pm: bluemosesErudition

“원소가 얼마만큼 작은지, 마침표 안에 10억 개 이상의 원소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미세한 원소지만 그 안은 대부분 텅 비어 있고, 나머지 공간은 핵,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로 하는 작은 에너지 집단을 이 핵 주변을 빛의 속도로 돈다. 이것들이 만물을 결합시키는 핵심 건축 재료들이다. 그러면 원소는 어디에서 에너지를 얻을까? 입자들을 결합시키는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그것을 ‘원자력’이라고 부른다. 원자력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는 과학용어에 불과하다.”(John Bevere)

: 1:04 pm: bluemosesErudition

1.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호세아 5:10~11)

2. ‘탐욕’(pleonexia)과 ‘오만’(hybris). 플라톤의 대화편 <<크리티아스>>가 말해주는 아틀란티스 제국의 멸망 원인.” 심판이 멀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심연에서 한숨이 밀려 나온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 “탐욕이 팽배하여 오만과 절망으로 점철된 극단의 시대에 위계의 제고를 포기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경계의 확장을 희구하며 <The Letters of Jonathan>를 편집 출간한다.”

: 1:03 pm: bluemosesErudition

“대부분의 연쇄살인범은 어린 시절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거나 부모 사이의 폭력을 목격하며 자라 성격 장애를 일으키며, 이것이 연쇄살인에 이른 주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를 하지 않는 부모님만큼 고마운 분은 없다.” _ 표창원(2005). <한국의 연쇄살인>. 랜덤하우스.

: 1:03 pm: bluemosesErudition

“스파르타 주민들은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laconic(간명한, 말수가 적은)’이라는 단어 자체가 스파르타를 둘러싸고 있던 ‘라코니아’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의 분위기가 잘 읽힌다.” _ Stephen Miller(2006). 진성록 역.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Conversation: A History of a Declining Art)>. 부글북스.

: 1:03 pm: bluemosesErudition

1. “오늘날에는 철학의 재구성(Reconstruction of Philosophy)이라는 제목이 철학 내부의 재구성(Reconstruction in Philosophy)이라는 제목보다 더 적합하다.” 존 듀이에 따르면, 철학의 재구성은 “언제나 진행되고 있으면서 때때로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위기와 전환점을 만들기도 하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각각의 철학의 과제, 문제, 주제들은 주어진 형태의 철학이 발생하는 공동체 내의 스트레스와 긴장으로부터 발생한다. … 재구성에 대한 요청은 재구성이 일어나야 하는 배경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관심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1919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전통적인 종교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가치관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야기한 새로운 가치관을 중재”하고자 하는 듀이의 문제의식이다. 우리가 오늘날 고전으로 간주하여 읽는 사회철학 텍스트들, 이를테면 플라톤의 «국가»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은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에 깊숙히 파고들지 않았던 소박한 시대에 산출된 것들이다. 그 텍스트들이 복잡다기한 인간의 내면을 치밀하게 탐구하고 있다고는 하나, 현대사회의 삶 속에서 다면으로 분리된 인간의 자아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며, 여러 측면에서 파악해야만 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전범으로서는 충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역자 이유선의 지적처럼 “철학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유리됨으로써 대중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거나 근거없는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늘날”에 듀이의 시도는 하나의 의미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듀이는 1919년 2월 일본에 도착하여 1919년 4월까지 체류하였으며, 1919년 2월 25일부터 3월 21일까지 도쿄제국대학에서 ‘철학의 재구성’에 관하여 강연하였다. 일본에서는 왜 듀이를 초청하였는가? 그의 강연을 통해서 일본의 지식인과 대중들이 얻고자하였던 것은 무엇이며, 과연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 당시의 일본이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였다는 것, 그 분위기가 듀이의 철학에 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서구적인 시도를 해보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에 파리평화회의가 시작되었으며, 1918년 일본에서는 최초의 정당내각이 성립함으로써 이 시대가 열렸다. 이때 전 세계적으로는 군주제에 대한 불신이 번져가고 있었고, 일본 국내에서는 천황제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이 증가하고 있었으며, 사회 정치제도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이 늘어나면서 국가를 개혁하려는 요구도 등장하였다. 또한 군주가 친히 다스린다는 관념이 약화되면서 메이지 천황 이후 새롭게 확립되어 온 천황제 자체에 대한 회의도 강해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본격적인 근대민주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다양한 통로로 모색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10년 정도 지속되었을 뿐이다. 다이쇼 천황의 사망에 이어 1928년에 히로히토가 쇼와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분위기는 경색되었고,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일본제국은 본격적으로 천황제 파시즘의 길로 나아갔다. 이러한 경과를 보면서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하나의 사상이 현실에서 관철되려면 그 사상의 수입과 번역, 철저한 학습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여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기존의 것을 다시 짜맞추는 재구성보다는 새롭게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세워 올리는 재구축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gaudium)

* 재구축은 새로운 정답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다. “학습하라, 선동하라, 조직하라!”(레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