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스(nomos)란 ‘나누다’라는 의미를 갖는 네메인(nemein)에서 파생된 단어로 … 이미 그어져 있는 선들을 지우고 다시 긋는 것, 이것이야말로 토지측량사 요제프 K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호5:10)
“노모스(nomos)란 ‘나누다’라는 의미를 갖는 네메인(nemein)에서 파생된 단어로 … 이미 그어져 있는 선들을 지우고 다시 긋는 것, 이것이야말로 토지측량사 요제프 K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호5:10)
“마음의 틀은 사물을 인식하고 느끼는 성향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은혜를 받아 바람직한 틀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깨끗이 청소된 필터를 끼운 에어컨과 같습니다. … 타락한 싫증이 없는 마음의 틀은 사물을 반듯하게 보고, 반듯하게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일을 나도 생각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나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나도 하고 싶어집니다. 은혜를 더 많이 받을수록 그 주파수는 더 잘 맞게 됩니다. 반대로 에어컨을 오래도록 청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면 먼지가 잔뜩 끼게 됩니다. 공기가 들어오면 차가워지기는 하지만 필터를 통해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저기 붙어 있던 세균과 먼지를 머금고 이상한 냄새까지 동반해서 밖으로 나옵니다.”(김남준, 2010: 87)
* “마음의 틀”은 사태를 해석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성향을 기획한다. 세속의 매연이 뒤섞인 후덥지근한 공기를 정화시켜 청명하게 내보낼 것인가, 아니면 되려 유독한 악취를 덧붙여 배출할 것인가.
기상학이 무력한 이유는 미시적 원인에 천착함으로써 총체적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비효과가 그렇다.
1. “하나님 아버지, 지난 1년을 돌이켜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씩 헤아려보면서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2.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님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 하나님, 내가 누구이며 또 내 집안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나를 이러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주셨습니까?”(삼하7:18) 므비보셋이 엎드려 아뢰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를 임금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삼하9:8)
3. 다윗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총을 송축하고 그것을 전송하는 삶이었다. 이는 “은송림”이 아닌가. ‘내일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사막에 생명나무를 심겠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 신상우 작곡, 조은아 작사, 박종호 찬양.
“인간에게는 ‘마음의 틀’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틀’이라는 용어는 주전 3~4세기경으로 올라가 그리스 철학자들이 인간 속에 있는 성향을 설명할 때,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도적인 경항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성향(disposition) 혹은 지향성(propensity)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김남준, 2010: 135)
* “장치”(푸코, 아감벤)와 “마음의 틀”(오웬, 레이코프)의 연계(부르디외, 일루즈)
학습을 통제하고 추동하는 메커니즘이 교육(Education)이고, 인생을 산출하는 노동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일(work)이다. 전자는 후자에 종속되는가. 양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아니 무엇이어야 하는가.
에로스 탄생에 관한 신화(203b~204c) _ “에로스는 길의 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의 자식이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서 항상 비어있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 반면, 아버지의 능력도 이어받은지라, 자신의 부족을 채워 줄 수단과 방법 역시 끊임없이 찾아내곤 한다.” _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성적 쾌감의 결핍과 갈망의 이중적 계기가 빚는 격정이다. 왜, 누구로도 대체될 수 있기에.
* 11월 24일 북한의 “연평도 폭격”으로 인해 오워의 전쟁 예언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크리티아스>에 기록된 “아틀란티스”의 멸망이 겹쳐진다.
*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연유는 이러하네. 여러 대에 걸쳐 신의 본성이 그들을 지배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 덕 이외에 모든 것을 경멸하였고 갖고 있는 재산 같은 것도 하찮게 여겼을 뿐 아니라 막대한 황금이나 그 밖의 재물 같은 그런 무거운 짐도 거뜬히 감당해 냈지. 그래서 그들은 부의 사치스러움에 취해 자제심을 잃어 그들 자신을 망쳐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애로운 교분을 통해 덕과 함께 불어나는 것임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었다네. … 그러나 그 신적인 부분은, 여러 사멸하는 것들과 수차에 걸쳐 뒤섞여짐으로써 그들에게서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오히려 인간적 성정이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자 그들은 급기야 갖고 있는 재물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평정을 잃어,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파렴치한 자로 간주되었네. 가장 귀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 … 참되고 행복한 삶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왕들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사람들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네. 사악한 탐욕과 권력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인데도 말일세.”(120e~121c)
* 그렇다.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평온의 피격이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최영미의 <지하철에서1>이 떠오른다.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But, insofar as they succeed, they create a recurrent problem for themselves. For workers are also consumers and capitalism requires consumers with the purchasing power to buy its products. So there is tension between the need to keep wages low and the need to keep consumption high.”
_ Capitalism has solved this dilemma, MacIntyre says, by bringing future consumption into the present by dramatic extensions of credit.